[뒤끝작렬]누가 朴대통령을 '코호트 격리' 했나

'무분별한' 국민과 차원이 다른 '과학적' 인식에 감염됐나

노컷뉴스의 '뒤끝작렬'은 CBS 기자들의 취재 뒷 얘기를 가감없이 풀어내는 공간입니다. 전방위적 사회감시와 성역없는 취재보도라는 '노컷뉴스'의 이름에 걸맞은 기사입니다. 때로는 방송에서는 다 담아내지 못한 따스한 감동이 '작렬'하는 기사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편집자 주]

지난 16일 오전 열린 보건당국의 브리핑에서는 평소처럼 발표후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한 기자가 "방역체계를 더 강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상식적인 지적을 하자, 보건당국 관계자가 갑작스레 언성을 높이기 시작합니다.

당국 관계자는 "방역은 과학에 근거해서 해야 한다"며 "이를테면 재건축조합에서 1500명 전체를 자가격리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느냐"고 따졌습니다. 이례적으로 박원순 서울시장을 직접 비난한 겁니다.

또 "우리는 WHO에서 권고한 기준에 따라 방역체계를 가동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간병인, 보호자들이 통제받지 않고 환자들에게 노출돼 병원감염이 더 확산됐다"는 말로, 메르스 확산의 책임을 국민들에게 돌렸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번져가는 메르스 사태 앞에서, 기자들은 물론 현직 서울시장까지 과학도 모르는 철부지로 취급당한 셈입니다. 국민들의 '후진적인 병실문화'를 탓한 보건당국의 당당함은 어디에서 나온걸까요.

불과 사흘 전으로 돌아가면 비슷한 풍경이 '데자뷰'처럼 펼쳐집니다.

◇보건당국의 '이유있는' 자신감…WHO는 왜 한국 정부를 편들었나

"한국의 언론과 전문가들은 '정부 초기대응이 실패했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무슨 과학적 증거에 근거해서 한국 정부의 조치가 완벽하다고 말씀하셨는지 근거를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 13일 열린 한국-세계보건기구(WHO) 합동평가단 브리핑에서 후쿠다 게이지 WHO 사무차장의 발언이 끝나기가 무섭게 취재진의 날선 질문이 빗발쳤습니다.

이날 후쿠다 사무차장이 "한국에서 이뤄진 작업들, 한국 정부의 대응 노력은 굉장히 높은 수준에 와 있다"며 보건당국과 삼성서울병원의 대응을 극찬했기 때문입니다.

대신 WHO가 전염병 확산의 주된 요인으로 지목한 범인은 역시 '의료쇼핑'과 '집단문병'이었습니다.

사흘 뒤에도 크리스티안 린드마이어 WHO 대변인이 UN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습니다. 한국의 메르스 사태를 두고 또 한 번 "한국의 병문안 문화 등에 메르스 사태 확산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국내 여론과 동떨어진 WHO의 이같은 논리는 어디서 비롯된 걸까요. 보건당국과 삼성서울병원으로부터 편향된 정보를 제공받았기 때문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입니다.

실제로 WHO평가단은 닷새간의 짧디 짧은 조사 일정을 정부당국과 '합동'으로 다닌 데다, 그 과정도 일체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국내 비판 여론과 '코호트 격리' 됐던 WHO로서는 정부나 대형병원이 일방적으로 제공한 정보에 상당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얘깁니다.


◇"중동식 독감일 뿐"…'손 안 씻은 국민 탓'하는 대통령

바다 건너 WHO야 국내 사정을 알기 어렵다지만, 안타깝게도 국민 여론과 격리된 건 WHO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16일 메르스 발생 이후 처음으로, 휴업했던 학교 현장을 잇따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시쳇말로 '그네체'를 다시 한번 선보인 건데요.

박 대통령은 이날 삼성서울병원 인근의 대모초등학교 위생교육 수업에 참관해 "지금 메르스라는 게 어떻게 보면 '중동식 독감'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어록'을 남겼습니다.

이어 "학생 여러분이 평소 음식을 골고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생활 주변도 깨끗이 관리하는 좋은 습관을 몸에 붙이면 이런 전염병들은 얼씬도 할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또 "독감이 매년 유행하고 이번에는 또 중동식 독감이 들어와서 난리를 겪고 있는데 세상을 다 열어놓고 살잖아요"라면서 "몇 가지 건강습관만 잘만 실천하면 메르스 같은 것은 무서워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처음 메르스가 발병한 날은 지난달 20일, 아직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과 4주만에 160여명이 '독감'에 걸렸고 6500여명이 외부로부터 격리됐습니다. 4천명에 가까운 격리해제자까지 합치면, 2주간의 격리조치를 당해본 국민이 벌써 1만 명을 넘어섰다는 얘깁니다.

◇어떤 독감이 한 달만에 스무 명 넘게 앗아갑니까

무엇보다도 벌써 스무 명 넘는 국민들이 하나뿐인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가운데 4명은 지병도 없이 건강했던 사람입니다.

'독감'으로 한 달새 스무 명 넘게 숨진 적이 또 있습니까. '독감'이 십수 명을 '불안정 상태'로 만들어놓을 수 있습니까. '독감'이 백 명 가까운 사람들을 한 달 가까이 격리된 중환자 병상에 눕혀놓을 수 있습니까.

정부는 고령 감염자가 아니면 완치된다고 했지만 벌써 40대 사망자도 나왔습니다. 심지어 30대 중반의 건장한 경찰까지 '에크모'를 장착한 채 위중한 상태입니다.

지병이 없으면 안전하다더니, 어떤 사망자에 대해선 "혈압이 높은 것도 심혈관계 질환으로 볼 수 있다"며 원래 아팠던 사람으로 치부해버립니다.

이런 와중에도 매년 유행하는 '독감'이라는 둥의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는 리더십, 이런 정부가 메르스 사태를 제대로 해결할 리 만무합니다.

'정부는 최선을 다했는데 후진적인 국민 문화로 대규모 전염병 사태가 불거졌다'는 면피성 논리가 지금 어떤 결과를 불러오고 있습니까.

대한민국의 국격은 이리도 낮소, 국민들은 이리도 미개하오, 정부가 앞장서 만천하에 천명하고 있는 행색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WHO를 비롯한 전 세계가 "한국은 병실 문화가 문제"라고 거리낌없이 얘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과연 그게 정부의 도리가 맞습니까.

정부 논리대로라면, 세월호 참사의 원인은 '무분별한 수학여행 문화'가 될 겁니다. 경주 마우나리조트 참사 역시 '무분별한 대학 문화'에 책임이 있다는 거겠죠. 책임은 뒷전으로 미룬 채, '무분별한 국민'들에게 세금만 꼬박꼬박 챙겨가면 되는 것이 정부의 '과학적 분별'입니까.

보건당국은 17일에도 "무분별한 문병, 간병, 방문객 중에 환자들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방역에 구멍이 뚫려 환자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게 진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 모든 현실이 무분별한 국민 탓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드니까 말입니다. 5년마다 제대로 분별해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또 이런 '참극'을 불러온 것일테니까요.

그래서 정부도 이처럼 쉽사리, 국민에게 '무분별' 딱지를 붙여댈 수 있는 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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