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면 큰 영화든, 작은 영화든 가리지 않고 하는 데까지 부딪히는 수밖에는 없겠죠. 역할 비중을 갖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어요. 예전부터 스스로 주연, 조연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해 온 이유도 여기에 있으니까요. 후배들에게 '저 선배는 어둡거나 센 역할도 신경 안 쓰고 용감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러려면 앞으로도 꾸준히 살아 숨쉬는 이야기를 해야겠죠."
12일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김윤석은 "전작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 '해무'(2014) 등에 주연으로 이름이 올라가 있지만, 사실 조연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분명히 말하면 화이는 여진구, 해무는 박유천이 주인공입니다. 저는 비중 있는 조연이었죠. 선배 입장에서 '왜 내 이름이 나중에 나오냐'고 푸념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봐요. 오히려 우리가 유연한 자세로 후배들이 클 수 있도록 풀어 줘야죠."
오는 18일 개봉하는 곽경택 감독의 '극비수사'(제작 ㈜제이콘 컴퍼니, 공동제작 ㈜영화사 신세계)는 이 점에서 '남쪽으로 튀어'(2012) 이후 오랜만에 만나는 주연작이라는 것이 김윤석의 설명이다. 그는 극비수사를 두고 "40대 베테랑들이 모여 만든 정통파 영화"라는 표현을 썼다.
"곽 감독님, 배우 유해진 씨도 40대잖아요. 나름 업계에서 선배 소리 듣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군내 나는 영화가 나왔으면 욕이라는 욕은 다 먹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도 작업을 하면서 긴장을 많이 했죠. 다행히 지금까지 나오는 반응을 보면 드라마와 캐릭터로 정면승부하려 했던 저희의 접근법이 통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장르적인 기교나 과장된 캐릭터, 억지로 아드레날린을 분비시키려 애쓰는 급박한 리듬감이 우리 영화에는 없어요. 그러한 자극적인 양념 없이 섬세한 드라마만으로 열매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시나리오를 보면서 들었죠. 재료만 잘 우려내도 구수한 국물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닭백숙과 비슷하잖아요. (웃음)"
◇ "아이 찾겠다는 소신…아이 엄마 아픔에 공감했기 때문"
영화 극비수사는 1978년 부산에서 발생한 실제 유괴사건을 다루고 있다. 김윤석은 극중 공길용 형사 역을 맡았다. 그는 모두가 포기한 상황에서도 김중산 도사(유해진)와 함께 아이를 찾는 데 온 힘을 쏟는 인물이다.
김윤석은 이날 인터뷰에 앞서 11일 열린 극비수사 홍보 행사에서 실제 공길용 형사와 김중산 도사를 만났다고 했다.
"영화 속 공형사와 김도사는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굉장히 부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그런데 두 분 얘기를 들어보니 실제는 더 심했다더군요. 두 분 다 아이 같은 눈을 갖고 계셨어요. 결국 파고들어 보면 인간은 소신이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겠더군요. 조금 손해 보면서도 재밌게 사는 사람과 절대 손해볼 수 없다는 생각에 매달려 사는 사람 말입니다. 저요? 손해 보면서 살아도 충분히 재밌게 살 수 있다고 믿어요. (웃음)"
김윤석은 "걷기만 해도 형사 같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공형사를 연기했다고 한다. 기존 장르물에 나오는 허세 가득하고 스타일리시한 형사가 아닌, 소시민적인 인물로 비쳐지는 것이 그의 의중이었단다.
"실제 공길용 형사님에 관한 자료를 보면 겉멋이 없는 분이란 걸 알 수 있죠.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게 곽 감독님이 공 형사님을 인터뷰한 내용 중에 있어요. '유괴사건을 맡았을 당시 가장 힘들었던 게 뭐냐'는 물음에 '유괴된 아이의 집에서 30일 동안 먹고 자고 하면서 아이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고 답하셨더군요. 아이 엄마가 62㎏에서 40㎏대로 떨어지는 걸 지켜보면서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을 했다는 거죠. 그렇게 아픔에 공감했던 점이 아이를 찾을 수 있다는 소신을 지켰던 힘이었다고 봐요."
"경쟁심에 휩싸여 누구를 이겨보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건 아닙니다. '내 자리에 안주하려는 건 아닌가' '영화의 상업적인 면에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제 삶을 한 번 검증해 보자는 의미가 크죠. 물론 지금 가장 즐거운 일은 연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점도 그렇고, 지방 촬영을 가서 배우·스태프들이 한 숙소에 머무는 것을 볼 때면 수학여행 온 기분도 들거든요. (웃음) 지금의 고민이 끝나면 배우로든, 다른 일로든 한 단계 성숙해지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해 봅니다."
김윤석은 배우로서 자신을 이끌어 온 동력으로 '동료들'을 꼽았다. "연기 잘하는 동료, 선후배를 보면서 얻은 자극이 가장 큰 힘이 됐다"는 말이다.
"지금도 20대, 30대 후배들을 보면서 '뭐 저렇게 연기를 잘하나'라고 놀랄 때가 있어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더불어 함께 크는 거겠죠. 영화판에 10년 정도 있었는데, 요즘 들어 아쉬운 점은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없다는 겁니다. 한쪽으로 치우치고 있다는 게 우려스러워요. 진정성을 지닌 한국영화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건 더불어 함께 크는 것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