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설이 숨지고 며칠 뒤 유서를 대신 써주고 자살을 배후조종한 사람이 있다며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렸다. 강기훈이라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상을 넘어서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동료학생들은 공안당국의 여론몰이나 장난질일 것이라며 무시하고 넘어갔다.
오판이었다. 검찰은 상상 이상이었다. 검찰은 김기설과 강기훈의 필체가 일치한다며 같은해 7월 강기훈을 기소했다. 대법원은 이듬해 유죄를 확정됐다. 굴곡이 많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도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당시 검찰은 군사정부의 충직한 하수인이었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때는 피해자 권인숙이 “성을 혁명의 도구로 이용했다”며 오히려 고문경관 문귀동의 손을 들어준 적이 있는 검찰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언론사에 입사한 뒤 1998년 서울중앙지법(당시 서울지법)을 출입하며 김형영을 볼 기회가 있었다. 김형영은 검찰이 강기훈을 기소할 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문서분석실장이었다. 김형영은 김기설의 유서에 적힌 필체가 강기훈의 것과 같다고 증언한 인물이었다. 검찰은 그의 증언을 철석같이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법정에서 본 김형영은 무슨 사건의 증인이 아니라 피고인이었다. 허위감정 혐의로 구속기소돼 법정에 선 것이었다. 처음도 아니었다. 김형영은 1992년에도 뇌물을 받고 허위감정을 한 혐의로 기소된 적이 있었다. 한마디로 사기꾼이었다. 이런 사람의 필적 감정을 믿어야 한다며 검찰은 강기훈의 인생을 산산조각냈다.
대법원은 뒤늦었지만 과거 군사정부 시절에 있었던 잘못된 판결에 대해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 적이 있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지난 2008년 “권위주의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법관이 국민의 기본권과 법치질서 수호라는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되찾고 새 출발을 하려면 먼저 과거의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반성하는 용기와 자기쇄신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반면 검찰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검찰은 강기훈을 법정에 세운 국가폭력의 한 당사자였다. 강기훈 뿐 아니다. 국가가 민주주의자들을 때로는 좌경용공으로, 때로는 간첩으로 몰아 때리고 가두고 살해할 때 검찰은 자의든 타의든 분명히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검찰은 자신의 잘못된 과거를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전지전능의 존재로 격상시킨 셈이다. 국민들이 검찰을 신뢰하기는 커녕 피하거나 무서워하고 심지어는 '정치검찰'이라 비판하는 그 이유를 검찰은 돌아봐야 한다.
14일 대법원이 강기훈의 무죄를 확정했다. 24년 만이다. 강기훈은 현재 간암 투병 중이다.
◇ CBS노컷뉴스 기획 '대필 공방 20년, 유서는 말한다' 다시보기
☞1편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2편 '필적감정'
☞3편 '정의란 무엇인가'
☞4편 '유서대필 사건 그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