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만 놓고 보면 3년 만의 드라마 복귀는 성공적이었다. 이 '성공'은 시청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김래원은 트렌디한 드라마보다 SBS 월화드라마 '펀치'를 선택했고, 그 선택이 옳았음을 스스로의 성장으로 증명해보였다.
이제 그의 얼굴에는 철모르는 달콤함도, 부드러운 미소도 없었다. 생각의 파도에 끊임없이 마모되고, 배우의 고뇌로 굴곡져 있을 뿐이었다.
다음은 취재진과 김래원과의 인터뷰 일문일답이다.
▶'펀치' 박정환의 내면연기, 많은 호평을 받았어요
박정환이 원없이 똑똑하고 멋있게 그려져서 너무 멋있는 척 할까봐 멋을 많이 흘려보냈어요. 박정환 캐릭터를 잡으면서 그런 멋있음을 드러내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그런 게 박정환의 멋이라고 생각했어요. 주변에서 칭찬해주시는 내면연기가 그렇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박정환 캐릭터가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박정환 캐릭터가 집착이 좀 심하고, 이상할 수도 있어요. 보면서 조금 이상하기도 했으니까요. 보면서 그만 좀 하라고, 여행다니고 그러지 시한부 인생인데 왜 저러냐고 그럴 수 있잖아요. 이상하지 않을 수 있게 계속 신경을 썼어요. 더 아파보이게, 더 고통스럽게 작은 씬에서도 몸과 마음의 고통을 진짜로 뽑아내려고 했어요. 주사 맞고 하는 것도, 핏대세워서 피멍들고 그랬던 게 기억이 나요. 시청자들이 봤을 때, 쟤는 진짜 아픈 애구나, 머릿속에 확 박힐 수 있게요.
▶ 박경수 작가와의 작업은 어땠나요?
정말 잘해주고 있다는 이야기는 중간에 한번 하셨어요. 지독한 경상도 분이라 표현 잘 안 하시는 걸 알고는 있는데, 본인이 생각한 것보다 박정환이란 인물을 제가 잘 알고 있고 그려낸 것 같아서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마지막회 대본에 메모를 써주셨어요. 박정환은 래원 씨가 만들었고, 나는 래원 씨의 박정환을 쫓아서 따라간 것 뿐이라고. 기분 좋았죠. 배우에게 그것보다 더 좋은 칭찬이 어디있겠어요.
중반까지는 전략적으로 잘 세웠던 것 같아요. 제작진은 너무 (의도를) 숨기면 시청자들이 모를 수도 있다는 의견이었고, 저는 끝까지 모르게 해야된다는 의견이었어요. 영화 '강남 1970'을 한 영향이 있죠. 당시 제가 진한 스파이 연기를 했는데 그런 영화적 연기를 드라마에 와서 진정성 있는 인물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 영화 이후에 드라마를 했는데 그러면 영화적인 연기가 더 잘 맞았나요?
영화 연기가 더 좋았어요. 만족하는 부분도 되게 크고요. 드라마는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는 것을 선호하는 시청자들도 많아요. 제작진에서는 제 연기가 굉장히 내면연기라서 잘 봐야 알고, 상황이 지나서 생각해야 알 수 있는 걸 아니까 처음에 좀 반신반의했어요. PD님도 가만히 있으니까 왜 연기를 안하냐고, 표정을 좀 지으라고 하시더라고요.
▶ 예를 들면 어떤 장면이요?
짜장면 '먹방'(먹는 방송) 씬이 처음 나올 때 CCTV가 설치돼 있었다는 걸 아는 시청자는 없었을 거예요. 이야기하기 전에, 버티컬도 만지고 방 둘러보는 게 있었는데 그걸 다 뺐어요. 눈을 조금만 움직여도 (시청자들이) 눈치를 채거든요. 저는 다 숨기고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모르는 척 하고 나서 짜장면 시킨 후에 알고 있는 것처럼 쳐다봤어요. 그게 큰 반전이 되는 거죠. 시청자들에게 팁을 안 주는 건데,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어요. 그냥 제 딴에 한 거예요.
▶ 유하 감독님에게 고마운 지점도 있겠어요.
드라마 4화 정도 나가고 유하 감독님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어요. 감독님에게 정말 좋은 거 잘 배웠다고, 드라마하면서 주변 관계자들이 칭찬 많이 한다고, 내면연기 좋다는 게 감독님 영향이라고 감사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고맙다고 그랬죠.
PD님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겠다. 너 지금 대학원생 연기를 하고 있다. 중학생 레벨로 낮춰달라'고 하셨는데 그냥 제 고집대로 했어요. 흔들렸죠. 전 연기를 다 했는데 안 했다고 하시니까. 화가 났으면 화가 난 표정을 짓고, 기분 나쁜 티를 내야되는데 티가 안 난대요. 저는 티를 안내야 생각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연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일반적인 드라마를 보면 굳이 카메라 쪽으로 시선 돌리는 게 많은데 중반부까지는 그런 게 없어요. 뒷모습 보여주고, 확 나가버리고 그렇죠. 그게 오히려 전 더 재밌고 괜찮았던 것 같아요.
▶ 아무래도 배우라면 임팩트 강한 연기를 하고 싶어하지 않나요?
드라마에서 전형적으로 하는 연기들이 있어요. 엔딩 때 카메라 쪽으로 시선 돌리고, 과하게 웃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연기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아요. 대사도 걸어 가면서 해버리는데, 서서하면 멋있죠. 그런데 가면서 하면 화면에서 자꾸 빨리 빠져버리니까…. 제가 몇년 전부터 연기할 때 중점적으로 생각한 건, 연기하지 말고 다큐멘터리의 인물을 카메라가 찍는 거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사람이 카메라를 보고 울지 않아도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감동을 주잖아요? 그런 거랑 똑같아요.
▶ 연기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바뀌게 된 계기가 뭔가요?
"배우가 아닌 사람으로서 세상을 살면서 여유가 더 생겼어요. 남자는 스물 아홉이랑 서른이 다르거든요. 그렇게 따졌을 때, 이제는 좀 '진짜'가 나와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들어서는 진짜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화면을 안 봐도 하면서 알아요. 이건 진짜로 됐다. 생각이나 계산 없이, 만들어서 대사하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느껴져서 나가는 말들이니까요. 연기를 친절하게 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만 더 리얼하고 진짜 같아서 그런 색이 좋더라고요. 상황이 진짜 같아서 울어야지, 배우가 울어서 우는 건 억지인 것 같아요.
▶ 작품에서 아쉽거나 그런 점은 없었나요?
아쉽거나 그런 건 없었어요. 후반부 대본이 밭게 나와서 아쉬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드라마는 항상 그래왔고, 영화를 길게 1년 정도 했었잖아요. 그 호흡에서 연기를 하다가 여기와서 하니까 더 아까운 거죠. 놓치고 가는 게 많은 것 같아서요. 좋은 배우라면 그 순간순간, 대처하고 쫓아가는데, 못 쫓아가니까 징징댄거죠.
연출하는 사람의 의견을 전적으로 따라야 된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아무리 잘하고 혼자 돋보인다고 해도, 그렇다면 지금의 '펀치'는 없었을 걸요. 개인뽐내기하는 건 올바른 선택이 아니고, 좋은 배우가 아닙니다. 뽐을 내더라도 선장이 가는 방향을 같이 바라보면서 가야죠. 그게 중심이에요. 제가 무엇을 하려는지 확실하게 보여드렸고, 나중에는 믿어주셨어요.
▶ 마지막 방송에 방송사고도 있었어요.
PD님도 언짢아하고 화내고 그러셨대요. 마무리하려다가 욕심내서 편집을 늦게까지 했대요. 그날 오후까지 촬영해서 CG를 대충해도 늦는 건데, 그걸 하다가 시간을 더 지체했어요. 다들 욕심내서 완성도높게 마무리하려다 생긴 일이라, 전 오히려 좋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아날로그 시절이었으면 해결이 됐다고 하더라고요. 테이프였으면 잘라서 붙이기만 하면 되는데 지금 엔지니어들이 그걸 못한대요.
▶ 진중한 작품들 많이 했는데, '옥탑방 고양이'처럼 로맨틱 코미디물은 어때요?
'옥탑방 고양이'가 벌써 12년이 흘렀네요. 스무 세살이었고, 그 때는 그 나이에 맞는 연기를 했었죠.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밝고 가벼운 역할은 진정성 있게, 가볍고 경쾌하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유쾌하고 가벼워보이는 듯하지만 안에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그런 인물을 하면 재밌을 것 같아요.
▶ 이제 연애도 하고 싶을 것 같아요.
저는 닫아놓고 그러지 않아요. 영화('강남 1970')촬영 전에 데이트도 한두번 한 친구가 있었는데 알아갈만할 때, 너무 역할이 중요하고 해서…. 영화는 진짜 욕심이 났거든요. 그 역할은 그래서 흔들리기가 싫었어요. 드라마하는 동안에는 아예 시간이 없었고…. 좋아질 수 있을만한 사람있는데, 만나고 가끔 연락도 하고 밥도 먹고 그래요. 자연스러운 거니까.
▶ 그럼 연애보다는 일을 중시하는 타입인가요?
지금은 그렇게 하고 나중에는 그러기 싫어요. 지금 더 확실하게 전보다 열심히, 작품도 되도록 많이 하고 싶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러면 옆에 있는 사람이 힘들 거예요. 극에 더 빠지려고 하기 때문에 예민하거든요. 영화는 지방에 촬영 가있다가 서울에 와서 흐트러지는 게 싫어요. 그 느낌을 뺏길까봐 서울에서도 시나리오 보고 젖어 있으려고 노력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