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평창의 최저 기온은 영하 18도, 오후에 풀린다고는 했지만 해발 700m 고지의 동장군을 이겨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체감 온도 영하 20도는 족히 됨직한 엄혹한 냉기와 눈발이 섞인 칼바람 속에 '평창 엠블럼 퍼포먼스' '한마음 성화봉송' '미니 올림픽 개회식' 등 행사가 진행됐습니다. 살을 에는 추위가 무엇인지 몸으로 절절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강풍에 섞인 눈이 목에 파고들어와 닿을 때는 섬뜩, 잊고 지냈던 강원도 양구 군 복무 시절이 떠오르기까지 하더군요.
이런 상황을 한방에 정리한 사진이 눈길을 끌었죠. 바로 '피겨 여왕' 김연아(25)가 강추위 속에 행사를 위해 대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평창올림픽 홍보대사로 참석한 김연아의 모습을 담아낸 '추운 연아'라는 제목의 사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한평생을 빙판에서 보내서인지 김연아는 잘 참아내며 행사를 마무리했습니다.
평창 엠블럼 퍼포먼스를 마친 김연아는 행사 중간 취재진과 인터뷰에 나섰습니다. 이날 행사에 참가한 소감과 홍보대사로서 평창 대회에 대한 성원, 또 선후배 우리 선수들에 대한 당부 등 무난한 내용이었습니다. 이날 행사에 맞춤 성격인, 다소 의례적인 주제였습니다. 저 역시 방송과 노컷뉴스 등 기사 작성을 하고 난 뒤 잊어버릴 터였습니다.
하지만 그 인터뷰를 곰곰이 살펴보니 무심하게 들어넘길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김연아가 어제 인터뷰를 했던 과정을 생각하면 더욱 의미가 상당했습니다. 과연 김연아의 평범할 수도 있는 멘트를 새겨들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한 인터뷰에도 꼼꼼한 준비
중요한 점은 인터뷰 내용이 거의 같았다는 겁니다. 먼저 진행한 답변과 나중에 나온 멘트가 대동소이했습니다. 김연아는 나중 인터뷰 중간중간 소속사인 올댓스포츠 관계자와 의견을 나누면서 앞선 인터뷰와 최대한 비슷하게 답변했습니다. 미리 준비했던 멘트인 겁니다.
홍보대사로서 공식적인 인터뷰인 만큼 김연아 측은 사전에 대기하던 취재진과 질문을 조율했습니다. 선수로서 경기 직후나 입출국 때 진행되는 것과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때문에 앞뒤 인터뷰 내용이 달라지지 않게끔 최대한 맞춘 겁니다.
특히 답변 내용도 행여 빠지는 부분이 있을까 충실하게 신경을 쓴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김연아는 개막 3년을 앞둔 행사에 참석한 소감에 대해 "평창올림픽이 3년 앞으로 다가왔는데 많은 분들이 멋진 대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여러분들이 동계스포츠를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셔서 다함께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대회가 될 수 있으면 한다"고 운을 뗐습니다.
이어 "3년 남은 동안 우리 선수들이 꿈에 그리던 무대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면서 "정말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많이 알아주셨으면 하고 많은 응원, 격려, 지원이 이뤄지면 좋겠다"며 국민들의 관심에 대해 당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선수들의 꿈의 무대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돼서 선수였던 나로서는 정말 영광"이라면서 "우리 선수들은 시차도 없고 열심히 노력해서 최고의 컨디션으로 경기해서 목표로 하는 성적을 이뤘으면 좋겠다"고 응원을 잊지 않았습니다.
▲시차 없는 올림픽은 축복이다
하지만 행여 다른 말이 나올까, 또 다른 질문이 나올까 미리 고민을 하고 준비했던 답변이라면 허투루 들어넘길 인터뷰는 아닐 겁니다. 무엇보다 동계올림픽을 두 번이나 경험한 김연아이기에 더 그렇습니다.
김연아는 올림픽에 나설 선수들, 특히 후배들에게 격려를 보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열려 시차가 없는 대회라는 기회임을 강조했습니다.
김연아는 2010년 캐나다 밴쿠버와 지난해 소치까지 10시간 안팎의 시차가 나는 올림픽을 치렀고, 금메달과 이에 버금가는 값진 은메달을 따냈습니다. 이외에도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선수권대회와 그랑프리 시리즈 등 숱한 외국 대회를 치렀습니다. 누구보다 시차와 환경 적응의 중요성을 잘 아는 김연아이기에 국내에서 열리는 올림픽이 우리 선수들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라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역대 최고인 종합 4위의 성적을 올린 바 있습니다. 금메달 12개, 은10개, 동 11개 등 33개 메달은 지금까지도 역대 최다입니다. 시차가 거의 없던 2008년 중국 베이징 대회 때는 역대 최다 금 13개를 따냈습니다.
물론 2012년 런던에서도 금 13개를 따내긴 했지만 시차, 환경은 여전히 무시하지 못할 변수입니다. 평창 대회에서 동계올림픽 역대 최고 성적이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모든 선수들이 피나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격려에 더 힘을 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뻔한 것을 왜 못 하나'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개막 3년을 앞둔 평창올림픽은 지금까지라면 '최고의 대회'를 기약하기 어렵습니다. 경기장 시설과 대회 운영에 대한 미흡한 준비로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지난해 인천아시안게임의 전철을 밟을 우려의 목소리가 큰 상황입니다.
조양호 대회 조직위원장은 "3년 남았지만 내년 테스트 이벤트까지 1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강조했지만 현재 대부분 신설 경기장의 공정율은 바닥을 기고 있습니다. 슬라이딩센터만 16%일 뿐 나머지는 10%도 채 되지 않습니다. 논란의 강릉 빙상장은 재설계조차 45%에 그치고 있습니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올림픽 서막을 열 개회식 총감독조차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혀를 찰 정도입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D-, 아니 G-1000일이 되는 오는 5월 16일에 맞춰 발표할 예정이라지만 재정이 충분하지 않은 가운데 준비 기간이라도 길어야 할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후 시설 관리에 대한 대책도 시급한 상황입니다. 강릉빙상장은 대회 후 철거와 존치 등 입장을 아직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칫 10조 원의 적자를 냈다는 1998년 일본 나가노동계올림픽의 악몽이 재현될 수도 있습니다.
김연아의 인터뷰는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뻔한 얘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뻔한 것을 우리는 지금 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뻔한 말을 누가 하느냐도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스타가 가진 힘입니다. 정부와 조직위, 강원도 등 대회를 준비하는 주체들의 삼위일체가 이뤄 '최고의 대회를 위해 많은 지원과 격려, 응원'을 해줘야 할 겁니다.
p.s-기사 작성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서울로 향하는 영동고속도로에는 때마침 눈발이 휘날렸습니다. 밤길에 눈까지 험난한 평창올림픽의 앞날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평범하지만 고민했던 조언을 무심코 넘긴다면 3년 뒤 휘날릴 저 눈발이 섬뜩, 피부가 아니라 심장에 내려앉을 겁니다.
하지만 곧 눈이 멈추면서 속도를 낼 수 있었습니다. 다소 밀리긴 했으나 많이 늦지 않게 목적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평범함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을 곱씹으며 가장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르다는 희망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