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서청원 최고위원은 5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당·정·청(黨政靑)은 칸막이가 없는 한배"라며 "물이 새면 한쪽만 살겠다고 피할 곳도, 피할 방법도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 최고위원은 "우리가 모두 새누리당 정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집권당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그렇기 때문에 뜻도 함께하고 책임도 함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더 이상 국민이 집권당과 정부를 걱정하게 해서는 안 된다"며 “어려운 문제는 완급조절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서 최고위원은 “겸허한 마음으로 합심해 국민에게 다시 한 번 따뜻함을 보여야 한다”면서 “그것이 새 지도부에 대한 국민의 기대”라고 강조했다.
서청원 최고위원의 이런 발언에 대해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경청했으며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나홀로’ 국정운영으로 지지율 하락세를 면치 못하며 여당으로부터도 버림받기 일보 직전에 처한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발언, 구원의 손길을 내민, ‘박근혜 지킴이’에 나선 것으로 들린다.
박 대통령을 위해 총대를 메고 당의 단합과 박근혜 대통령을 향한 변함없는 여당의 충성을 우회적으로 강조한 발언이다.
“칸막이 없는 한배”라는 말은 한쪽(청와대)이 무너지면 다른 쪽(여당)도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순망치한’의 관계라는 설명이다.
새누리당 유일호 의원은 “서 최고위원의 칸막이 없는 한배라는 발언을 보면서 정치 원로다운 경륜과 역할이 무엇인지를 느꼈다”며 “자칫 한쪽으로 기울어 회복하기 어려울지 모를 당청관계를 중간으로 잡아매는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익명을 요구하는 여당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는 서청원 최고위원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면서 “위기에 처한 청와대를 구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물론 서청원 최고위원의 당.정.청 한배 발언은 비박과의 정면 충돌하기엔 수적 열세라는 현식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어 일종의 ‘휴전’ 제안으로 들리기도 한다.
당청관계가 더 악화되면 모두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의 표출로도 해석할 수 있다.
김무성 대표도 공사석을 막론하고 “당이 사사건건 청와대와 대립하면 모두 공멸한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한다.
정군기 홍익대 교양학부 교수는 "친박 진영에 훗날을 도모하자는 분위기를 전하면서, 비박에게도 너무 튀는 듯한 행동은 자제하자는 일종의 조용한 경고로 해석된다“고 풀이했다.
서청원 최고위원의 한배 발언은 그래서 다중 포석용이라는 것이다.
정치적 해석과는 별개로 청와대와 여당의 간극, 틈새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고 봉합되는 모양새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새누리당이 인적쇄신이나 복지와 증세 문제를 놓고 청와대와 대립각을 보이는 돌직구 모습을 당분간 자제할 것으로 예상된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지난해 9월 29일 세월호 특별법 협상을 놓고 새누리당이 새정치민주연합의 회담 제안을 거부하며 시간을 끌자 특유의 한마디 정치를 했다.
서 최고위원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이완구 원내대표에게 “당 선배로서 말씀드린다”면서 “(야당을) 안 만날 이유가 없다. 저쪽에서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한) 카드가 없더라도 만나야 한다. 그것이 여당의 책무이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며 즉각적인 여야 협상을 촉구했다.
“산적한 문제를 감안해서라도 한 번 더 인내하고 만나서 내일 원만한 국회 본회의가 열리도록 간곡히 부탁드린다”며 이완구 대표의 등을 떠밀었다.
이완구 원내대표(당시)는 “말씀 감사하며 오늘 야당을 만나겠다”고 호응했고, 실제로 박영선 당시 새정치연합 원내대표와 만나 세월호 특별법을 합의했다.
2014년 9월 30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법>이라는 세월호 특별법이 여야 만장일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서청원 최고위원이 세월호 특별법 협상의 막힌 물줄기를 바꿔버린 것이다.
박영선 전 원내대표는 “이완구 대표가 세월호특별법 합의를 거부하며 만나주지 않길래 정의화 국회의장에게 회동 주선을 요구했고, 정 의장이 서청원 최고위원에게 부탁한 것으로 안다”면서 “서청원 최고위원은 여.야의 대화론자, 협상론자임을 알게 됐으며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청원 최고위원은 지난해 1월 9일 이재오 의원의 개헌론 불지피기도 한마디로 정리해버렸다.
이재오 의원이 최고중진회의에서 “정치 개혁은 개헌”이라며 개헌론을 개진하자 “개헌이 쉬운 것이냐. 해봐서 알지 않느냐 일단 지금은 경제 활성화에 매진하고 그 다음에 개헌 논의하면 안 되겠느냐”고 말했다.
이재오 의원은 굳은 표정으로 더 이상 발언을 하지 않았다.
서 최고위원은 그 뒤 이재오 의원을 따로 만나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다.
서청원 최고위원의 개헌 불가 발언이 들불처럼 번질 것 같던 개헌론의 불을 꺼버렸다.
서 최고위원은 지난해 말 여권을 뜨겁게 달군 기업인들의 가석방론에 대해서도 가닥을 잡았다.
지난해 12월 29일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나와 "(기업인)가석방 문제는 일단 일리는 있지만 미시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면서 "국민 대통합과 화합차원에서 가석방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며 정식 사면론을 제기했다.
서 최고위원은 "이번에 얘기가 나온 김에 당의 중지를 모아 야당과 협의를 하고 대통령에게 가석방과 사면을 국민 대통합이라는 명제 하에, 경제 활력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건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집권당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고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드리는 것"이라며 “기업인 외에도 생계형 민생사범을 비롯한 모범적인 수형자들에게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해 재벌 총수를 대상으로 한 ‘원포인트’ 가석방이 아닌 전면적인 사면론으로 흐름을 돌렸다.
서청원 최고위원이 준비해 던진 이런 한마디 정치가 박근혜 대통령 지키기와 직접적인 연관이 깊다는 곱지 않은 일각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무엇이고, 원로 정치인이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곱씹게 해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