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달픈 번데기 장사, 번데기 담는 신문·잡지 읽으며 위로 받아
지난 1984년 여름. 일찍 남편을 여의고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이종희(70)할머니는 하루살이 밥벌이를 위해 초등학교 앞 번데기 장사를 시작했다.
신출내기 장사꾼의 등장에 학교 앞 구멍가게 상인들과 단속반으로부터 시시때때로 불호령이 내려졌고 이 할머니는 도망치다시피 학교를 옮겨 다니며 눈물로 장사를 이어갔다.
그런 이 할머니에게 단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가고 주위가 적막해지면 눈에 들어오던 번데기를 싸는 신문과 잡지의 글들은 이 할머니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줬다.
"아이들이 우르르 나왔다가 수업 들어가면 할 게 없거든, 번데기 담는 종이의 글들이 보이더라구. 그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한 줄 한 줄이 나한테 이야기를 건네주는 것 같이 재미가 있었어요. 리어카 세워놓고 아이들 나올 때까지 읽고 또 읽었지요"
동네에 고물장수가 지나갈때면 아이들이 새 냄비를 가져다 엿을 바꿔 먹었듯이, 꼬마들이 번데기를 바꿔먹기 위해 어머니가 보던 잡지를 들고와 한바탕 홍역을 치룬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새 글을 읽고 싶은 생각에 아이들이 집에서 버리는 신문이나 잡지를 가지고 오면 번데기를 듬뿍 담아줬거든. 그런데 하루는 한 아주머니가 성질이 나서 와서는 소리를 치는 거예요. 아이가 엄마가 보고 있던 새 잡지를 들고 와서 번데기를 바꿔 먹었던 거지. 손이 발이 되도록 사과를 했지요. 그만큼 글 읽기가 좋았습니다"
◈ 호기심으로 시작한 한자공부, 1급 자격증 따기까지…
글을 읽으며 스스로를 위로하던 이 할머니였지만 한계가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던 이 할머니에게 군데군데 한자가 섞여 있던 당시 신문과 잡지의 글들은 아쉬움을 넘어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두 어줄 읽으면 한자가 막 나오니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궁금한 마음에 주변을 지나던 사람들한테 물어봐도 서로 민망하기만 하고, 보수동 헌책방에 가서 옥편을 하나 샀지요. 번데기를 담아주기 전에 한자를 종이에 적어뒀다가 집에 와서 옥편을 찾아봤어요"
"뭔가 싶어서 읽어보니 한자도 자격증이 있다는 거야. 아이들도 다컸고 몸이 좋지않아 장사를 계속할 수 없었던 터라 일을 그만 두면 꼭 따야겠다는 다짐을 했지"
이 할머니는 번데기 장사를 그만둔 지난 2006년부터 본격적인 자격증 취득 준비에 들어갔다. 4급과 3급 자격증은 단숨에 땄으나 2급부터는 쉽지 않았다.
조용히 글을 읽던 것이 버릇이 돼서 그런지 새벽 시간에 주로 공부를 했다. 평소 열쇠를 잃어버리는 등 건망증이 있었지만 한자는 그렇지 않았다.
"건망증이 있어서 열쇠도 자주 잃어버리고 하는데, 좋아서 그런지 한자는 한번 외우면 잘 안 잊어버리고 그랬어요. 종이가 아까워서 달력이고 신문지고 간에 집안에 있는 종이란 종이에는 한자를 썼습니다."
지난해 1월 이 할머니는 대학생들도 어렵다는 한자 1급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4번의 도전 끝에 이룬 결실이었다. 자격증 취득의 기쁨보다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한자들과 젊은 시절을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보람이 느껴졌다.
지난해 구청에서 실시하는 노인일자리 사업에 지원했던 이 할머니는 이력서의 자격증을 눈여겨 본 담당자의 소개로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 실버 티쳐로 활동하고 있다.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이에요.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손주같은 아이들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바라보면 너무 기분이 좋아요. 아이들 알려주려고 또다시 공부를 해야해요. 한자에는 예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아이들한테 알려주고 싶어요"
◈ 중고 키보드로 컴퓨터 공부, 즐거워서 공부해요
이 할머니의 방 안에 있는 책에는 각기 다른 이름들이 쓰여져 있다. 헌 책방에서 남들이 쓰다 만 책을 사 공부를 하다보니 ㅇㅇ 중학교 ㅇ 반 ㅇㅇㅇ 식의 이름이 쓰여져 있는 것이다.
모니터도 본체도 없는 키보드만 두드리고 있어도 이 할머니는 연신 즐거워 했다.
"자판을 두드리는게 서툴러서 중고컴퓨터점 가서 하나 샀어요. 손주들한테 이메일을 보내고 싶은 생각에 즐거운 마음으로 배우고 있어요"
영어 공부도 시작했다. 컴퓨터를 배우다 만난 영어단어들이 번데기를 팔던 그 시절 한자처럼 다가 왔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번데기 종이에 쓰인 글을 끊임없이 읽었던 호기심 많은 한 70대 할머니는 공부를 하면서 웃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배움이 친구였고 남편이었고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 이었어요. 그러면서 재미를 알게 됐고 재미가 있으니 힘들지 않았어요. 이제는 무언가를 배운다는게 그저 즐거워요. 번데기를 담았던 종이에 글을 써준 이름 모를 선생님들에게 감사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