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행사를 통해 김 고문이 평생 가슴에 품었던 민주주의라는 희망은 남은 이들의 가슴에 크게 자리잡았다.
민주화운동 투사였던 고인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렬은 행사 시작 전부터 명동성당을 가득 채웠다.
700여명의 추모객들로 꽉 찬 명동성당에 미처 들어가지 못한 500여명의 시민들마저도 영하의 날씨 속에 그를 기리기 위해 자리를 지켰다.
고등학교 1학년 딸과 함께 나왔다는 신현미(49)씨는 “김 고문은 우리나라 정치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순수한 지도자였기에 그 정신을 기리려고 나왔다”고 말했다.
또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 했다고 밝힌 오 모(43)씨는 “스타나 인기인이 아닌 형님처럼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실 것 같은 분이었다”며 김 의장을 회상했다.
성당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독재와 군부의 탄압 앞에 당당하게 맞서 싸웠던 청년 김근태의 영상이 상영되자 참석자들은 고개를 떨구고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을 지켜보던 병준, 병민 남매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에 하염없이 울먹였다.
하지만 부인 인재근 씨는 ‘희망은 믿는 사람에게 먼저 온다’는 남편의 평소 믿음을 따라 슬픔 앞에 나약하지 않고 당당했다. 인 씨는 “제 짝 하늘나라 가는 길 외롭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이어 “김 의장은 그냥가지 않았다”며 “비밀 병기 인재근을 남겨 놨다”면서 민주주의 파이팅을 외쳤다.
김 고문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하면서 민청련의 상징을 두꺼비로 삼았다. 김 고문과 독재에 항거했던 민청련 관계자는 단상에 나와 "두꺼비가 뱀에 잡히면 죽지만 뱀도 두꺼비 독에 쏘여 죽고 두꺼비 새끼들이 그 속에서 뱀을 자양분으로 성장하듯, 김 고문은 자신에 대한 탄압을 민주주의를 꽃피우기 위한 희생으로 생각했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김 고문은 두꺼비 같은 희생으로 여덟 차례 전기고문과 두 차례 물고문, 수배와 수감 생활을 버텼고 그의 희생은 민주주의의 자양분으로 남았다.
이날 열린 추모문화제에는 영화 배우 권해효 씨의 사회와,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의 추도사, 영화배우 문성근 씨의 조시 낭독 등으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됐다.
장례위원회는 3일 오전 8시 30분에 명동성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뒤 10시 청계천 전태일거리 전태일 동상 앞에서 노제를 지낸다.
이어 고인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으로 옮겨져 영원한 안식에 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