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을 몰라 어쩔 줄 모르는 박진아가 돌려주려 했지만 데비는 받지 않았습니다. 결국 박진아는 시상대에 있던 데비의 발치에 메달을 놓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른바 '메달 거부'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시상식 뒤 자원봉사자가 라이쉬람의 메달을 들고 소청실로 향하자 인도 취재진이 "한국인들이 메달을 훔쳐가려 한다"며 막아서면서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진 겁니다. 경찰과 관계자들의 제지로 일단락되긴 했지만 씁쓸한 해프닝이었습니다.
심판이 박진아의 손을 들어주자 데비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한동안 링 위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인도 코치진은 격하게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승부였습니다. 이승배 대표팀 감독은 "유효타에서는 박진아가 더 많았다"고 했습니다. 다만 보기에 따라 근소하게 데비가 우세했다는 의견도 적잖았습니다.
이날 경기를 지켜본 한 한국 기자는 "우리나라 선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이겼다고 보기는 어려웠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하물며 인도 선수와 취재진이면 오죽 했겠습니까.
▲저절로 떠오르는 2년 전 신아람의 기억
데비의 눈물을 보면서 2년 전 런던올림픽 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바로 펜싱 여자 에페 신아람(계룡시청)이 당한 '1초 오심' 사건이었습니다.
4강전에서 신아람은 브리타 하이데만(독일)에 종료 1초를 남기고 억울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세 번의 공방에도 1초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 마지막 1점을 뺏기고 말았죠. 어이없는 판정에 신아람은 피스트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온 국민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당시 해외는 물론 국내 언론들은 일제히 오심을 지적했습니다. 유럽 대회인 만큼 비유럽 국가에 대한 편파 판정이 아니냐는 지적이 쏟아졌습니다. 국민 여론도 들끓어 다소 안이하게 대응했던 대한체육회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신아람은 당시 규정에 따라 절차를 밟아 정당하게 항의를 했습니다. 외국어와 규정에 능통한 심재성 코치가 강력하게 항의해 비디오 판독까지 이끌어냈습니다.
반면 데비는 이의 제기 절차를 제대로 밟지는 않았습니다. 국제복싱연맹(AIBA) 규정에 선수가 판정에 불만이 있을 경우 경기 후 30분 안에 경기 감독관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데비는 이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시상식에서 메달을 다른 선수에게 걸어주는 돌발 행동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신아람의 억울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당초 신아람도 오심 뒤 동메달 결정전 출전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박용성 당시 대한체육회장의 권유로 끝내 나섰지만 허탈해진 마음에 아쉬운 패배를 안았습니다.
▲박진아도 피해자 …해답은 나와 있다 '공정성'
박진아도 억울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4년 동안 혹독한 훈련 끝에 나선 대회에서 값진 메달을 따냈는데 엉뚱한 쪽으로 포커스가 맞춰진 황당한 상황입니다.
4년 전 광저우에서 동메달 1개를 따낸 한국 여자 복싱은 박진아의 은메달도 역대 최고 성적을 냈습니다. 그런 결실이 판정 논란에 의미가 퇴색돼 버린 겁니다.
시상식 뒤 기자회견에서 박진아는 "당황스럽다"면서 "데비가 메달을 주면서 뭐라고 했지만 알아듣지 못했다"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이후 예상치 못한 사태에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복싱이 해결해야 할 숙제이기도 합니다. 복싱은 KO가 아닌 이상 심판들이 매기는 점수에 의해 승부가 갈립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실수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 감독은 "복싱이라는 것은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점수가 달라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필이면 복싱 판정의 사각지대에 박진아와 데비가 낀 겁니다. 더 공교롭게도 박진아는 대회 개최국인 한국 대표팀입니다.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쓰지 말라는 속담처럼 난처한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한국인인 까닭에 박진아의 은메달이 기쁘지 않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기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 뒷맛이 개운치는 않은 메달이기도 합니다. 과연 데비와 신아람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두 눈물을 모두 현장에서 직접 봤던 저로서는 이 질문에 대해 감히 답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