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은 경찰이라는 국가 권력 기관이 조직적으로 고문을 저질러 사망케 한 사건이지만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은 선임병들이 일으킨 엽기적이고 집단적인 폭행사망으로 사망의 발단은 다르다.
그렇지만 축소은폐를 비롯한 두 사건에 대한 당국의 뒤처리 과정이 상당 부분 닮은꼴 모양새를 띠고 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은 ‘턱 치니 억하고 숨졌다’는 게 경찰의 첫 사망 발표였다.
지난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이었던 박종철군이 경찰의 고문에 의해 숨진 뒤 경찰은 철저히 은폐했다.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치안본부 5차장이 고문치사 사실을 보고 받았음에도 사건의 파장을 우려해 은폐와 축소로 일관했다.
군 당국은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 발생 이후 3개월이 넘도록 폭행과 가혹행위를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은폐 의혹이 확산되고 있다.
군 당국은 수사 중인 사건이라는 이유로 전모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해명하지만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전모가 밝혀졌음에도 군 당국은 함구로 일관해 은폐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28사단 헌병대는 선임병들이 윤 일병을 엽기적이고 처참할 정도로 폭행을 한 사실을 사망 당일 대부분 파악했으며 이 사실을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에게 곧바로 보고 한 것으로 국방부 조사본부(헌병대)의 주요 사건 보고 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 김관진, 백낙종 조사본부장으로부터 지속적 가혹행위 보고 받아
김관진 국방장관은 4월 8일 백낙종 국방부 조사본부장으로부터 28사단 윤 모 일병이 선임병들로부터 지속적인 가혹행위를 받아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4월 15일 군 검찰에 송치된 이후 파악한 것으로 설명했다.
"김관진 장관은 윤 일병이 쩝쩝 소리를 내며 먹는다는 이유로 가슴 부위 등을 수십 회 폭행당해 기도 폐쇄로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뿐이라고 국방부는 설명했다.
지속적인 구타와 엽기적인 가혹행위 등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해 추가 보고는 일체 없었다는 것이다.
국방부는 현 청와대 안보실장인 김관진 당시 국방장관의 책임이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추가 보고가 없었다고 얼버무렸으나 추가 보고를 받지 않았다는 게 더 큰 문제다.
병사가 집단적인 구타로 숨졌다면 '장관으로서 추가 보고를 왜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게 당연한데도 국방장관이 보고를 받지 않았다니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다'.
국방부 발표는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의 병사들에 대한 인권과 생명존중의식이 없었음을 단적으로 내보인 것이다.
군 검찰과 헌병대, 기무사 등이 조사에 나섰다면 육군참모총장은 물론이고 국방장관에게 보고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기무사령부는 육군참모총장과 국방장관뿐만 아니라 청와대까지도 직보하는 군 기관으로 알려졌다.
◈ 김관진, 여러 차례 보고 받고 전모 파악했을 듯
최소한 김관진 장관은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을 단 한 번이 아닌 여러 차례 보고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김관진 장관이 4월 전군에 가혹행위 실태조사를 실시하라고 지시한데 이어 7월 한 달간 특별 부대정밀진단도 진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군 창설 이후 전 군대상 일반 명령이 35년 만에 내려진 것은 이례적인 조치다.
김관진 장관이 처음부터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국방부와 청와대가 "김 장관(현 청와대 안보실장)이 엽기적 내용을 보고 못받았다"는 해명과 변호가 의혹을 더욱 키우고 있다.
엽기적 내용을 보고 받지 않았다면 김 실장의 책임이 가벼워지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낳기 때문이다.
성격은 다를지언정 윤 일병 폭행사건이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축소 은폐라는 점에서는 거의 흡사하다.
◈ 누가 축소은폐하도록 지시했는지가 핵심
누가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도록 지시했는지가 초미의 관심이다.
군은 윤 일병이 사망한 이후 군 인권센터에 의해 전모가 윤곽을 드러낼 때까지 113일 동안 쉬쉬하며 언론 공개를 꺼렸다.
군 당국은 5월 22일 상해치사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선임병들에 대한 3차례에 걸친 심리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윤 일병 유가족의 수사기록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군 당국의 은폐 내지는 묵인 속에 윤 일병 사건의 재판은 진행됐다.
특히 국방부 합수단은 사망 다음날인 지난 4월 8일 윤 일병은 기도가 막힌 질식 뇌손상으로 사망했다고 밝혔으나 부검 감정서에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뇌에 멍이 생긴 부종이 있었으며 비장 파열과 장기 출혈 등이 기록돼 있다.
뇌 부종이 생기고 비장 파열과 장기 출혈이 있었으며 온 몸에 피멍이 들었다면 교통사고나 집단 폭행에 의한 사망임이 확실한데도 군은 질식사라고 우겼다.
군 당국은 또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을 28사단 내의 가혹행위 사건으로 한정해 처리하려고 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 28사단 내에서 처리했던 것이 은폐축소 의혹을 더 키웠다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을 28사단 보통군사법원에 맡겨 처리한 것은 군단사령부도, 3군사령부도, 육군도, 국방부도 모두 한통속이었음을 보여준다.
육군본부와 함참, 국방부라는 상부로 이어지는 문책론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사퇴한 권오성 육군참모총장과 김관진 국방장관이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을 아주 구체적으로 보고 받았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은폐축소의 실체가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을 누가 28사단 내 가혹행위 사건으로 한정시켰는지, 113일 동안이나 언론과 국민 공개를 막았는지, 국방장관과 참모총장은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과 관련해 어떤 지시를 했는지 등 의문은 꼬리를 문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을 은폐 축소한 혐의로 강민창 당시 치안본부장이 구속됐다.
◈ 113일 은폐, 지방선거와 재보선 일정과 맞물린 이유는?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이 일어난 4월 7일로부터 9일 뒤엔 세월호 참사가 터졌고, 6월 4일 지방선거와 7월 30일 재보궐 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은 재보궐 선거 하루 뒤인 지난달 31일 군 인권센터에 의해 공개됐다.
7월 31일은 여당인 새누리당이 전국 15곳에서 치러진 재보궐 선거를 압승(11 대 4)한 바로 다음날이다.
우연의 일치인가?
만약 세월호 못지않은 폭발력과 휘발성을 가진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이 6.4 지방선거 이전이나 7.30 재보궐 선거 이전에 공개됐다면 그 결과는 어찌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