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감독이 이끈 축구대표팀은 2014 국제축구연맹(FIFA) 브라질월드컵에서 목표했던 사상 첫 원정 8강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1998년 프랑스 대회 이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조별리그 무승에 그치며 '아시아의 맹주'를 자처했던 한국 축구의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안겼습니다.
하지만 축구협회는 브라질월드컵의 부진 원인을 홍 감독 한 명에게 묻지 않겠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습니다. 협회 내부적으로도 책임을 지겠다는 뜻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감독으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던 홍 감독이 이번 브라질월드컵이 실패를 교훈 삼아 내년 1월 아시안컵서 명예회복을 기대한다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줬습니다.
결과적으로 떠나겠다는 홍 감독을 붙잡으면서 모든 비난은 축구협회가 감수하겠다는 뜻을 공개한 셈입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지만 축구협회는 브라질월드컵 부진의 원인을 찾기도 전에 일단 감독부터 살려야 했을 정도로 다급했던 모양입니다. 이번 선택을 통해 축구협회는 전략적으로 홍명보 감독을 '차세대 한국 축구의 지도자 모델'로 육성하고 있다는 일부의 시기 어린 비난을 스스로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특히 우리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가장 최근인 1998년 프랑스 대회에서 조별리그 2경기 만에 차범근 감독이 조기 경질됐던 것과 비교하면 협회의 이번 결정은 상당한 온도 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차 감독의 아들이자 현역 축구선수인 차두리(FC서울)는 홍 감독의 유임을 결정한 축구협회의 발표가 나자 SNS를 통해 "98년에는 왜? 혼자서"라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했을 정도입니다.
이번 결정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축구협회가 홍명보 감독을 향한 비난의 이유를 잘못 판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많은 축구팬은 브라질월드컵에서의 부진을 이유로 홍명보 감독의 경질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홍 감독이 지난해 6월 부임할 당시 직접 제시했던 축구대표팀의 이상적인 선발과 운영에 대한 규정을 본인이 스스로 가장 크게 어겨가며 '원 팀'을 구성하고 운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목표(원 골)을 향해 공통된 정신자세(원 스피릿)로 똘똘 뭉친 단단한 팀(원 팀)을 만들겠다던 홍명보 감독은 자신이 제시한 선수 선발의 기준까지 어겨가면서 특정 선수를 선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많은 잡음이 결국 대표팀의 경기력이 악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이는 대표팀 선수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된 부분입니다. 더 큰 문제는 해당 선수들이 월드컵에서 보여준 경기력이 생각처럼 뛰어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홍 감독은 지금까지 유연하지 못한 전술과 제한적인 선수 구성으로 국제무대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습니다. 지난 2009년 FIFA 20세 이하(U-20) 이집트 월드컵 8강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동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 동메달을 이끈 자신의 전술은 물론 자신과 함께 성장한 '홍명보의 아이들'이 더는 국제무대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상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하는 갈림길에 섰습니다.
축구협회의 지원이 과거 대표팀을 이끌었던 다른 감독과는 다르다는 것이 공개된 만큼 홍명보 감독은 남은 1년의 임기 동안 더 큰 부담 속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타의에 의해 축구대표팀에 잔류하게 된 홍명보 감독의 당면 과제는 1960년 이후 54년째 오르지 못한 아시안컵 정상 도전입니다.
내년 1월 호주에서 열리는 아시안컵 우승을 목표로 팀을 운영해야 하는 홍 감독이지만 그의 모든 선택은 외부의 평가와 자유로울 수 없게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축구협회는 홍명보 감독에게 '시한부 꼭두각시'를 만드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홍명보 감독이 아시안컵에서 우승이란 성과를 낸다면 속된 표현으로 '본전 장사'가 되겠지만, 실패할 경우에는 홍명보 감독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브라질월드컵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말로만 끝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장 축구협회가 나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