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무' 욕망의 바다에서 표류하는 한국사회 슬픈 자화상

"우린 지금 한 배를 탄 거야"…'살인의 추억' 명콤비 봉준호 제작 심성보 연출

영화 '해무' 제작보고회가 1일 오전 서울 신사동 압구정 CGV에서 열린 가운데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배우 김윤석 유승목 김상호 이희준 박유천이 기자간담회에 참여하고 있다. (노컷뉴스 이명진 기자)
"우린 지금 한 배를 탄 거야. 완벽하게."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에 불어닥친 외환위기는 구성원들의 삶과 가치관을 180도 바꿔 놓았다.

'노동시장 유연화' '기업 구조조정'이라는 신자유주의의 대의명분 아래 수많은 이들이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렸고, 가장의 실직으로 당장 생계를 잇지 못하게 된 가족 구성원들은 그동안 신성한 것이라고 배워 온 노동력을 값싸게 제공하며 푼돈을 벌어들여야 했다.
 
그 사이 국가 부도 사태에 직면한 정부는 '공생'보다는 '경쟁'의 가치를 좇는 기업 논리에 입각해 '작은 정부'로 탈바꿈하면서 국민보다는 자본의 손을 들어 주기에 바빴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소위 '천박한 자본주의'라 불리우는 무한경쟁의 용광로가 됐다. 삶의 질보다는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게 된 구성원들이 급격히 늘었고, 돈이 돈을 번다는 '진리'에 입각해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됐다. 개개인은 욕망을 극한으로 부추기는 용광로 안에서 허우적댔다.

십수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도 한국 사회가 써내려가는 이러한 비극은 진행형이다. 공교롭게도 다음달 13일 개봉하는 영화 '해무'의 배경이 외환위기가 불어닥친 시점이다. 그렇게 이 영화의 제목으로도 쓰인, 극의 흐름을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게 만드는 해무(바다 위에 끼는 안개)는 특별한 상징성을 지니게 된다.
 
1일 서울 신사동에 있는 CGV 압구정점에서 열린 해무 제작보고회에서 이 영화의 연출을 맡은 심성보 감독이 "해무는 단순히 공포를 전달하려는 장르 영화의 장치가 아니라 인생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어려움, 막막함"이라고 말한 것도 그 증거다.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한 해무는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한 여섯 선원이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해무 속에서 밀항자들을 실어 나르는 와중에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때 여수 바다를 주름잡던 어선 전진호는 더 이상 만선의 수확을 거두지 못하고 감척사업 대상이 된다. 배를 잃을 위기에 몰린 선장 철주(김윤석)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선원들과 함께 낡은 전진호에 몸을 싣는다.
 
전진호는 선장 철주를 비롯해 배에 숨어사는 인정 많고 사연 많은 기관장 완호(문성근), 선장의 명령을 묵묵히 따르는 행동파 갑판장 호영(김상호), 돈이 세상에서 최고인 거친 성격의 롤러수 경구(유승목), 언제 어디서든 욕구에 충실한 선원 창욱(이희준), 이제 갓 뱃일을 시작한 순박한 막내 선원 동식(박유천)까지 여섯 명의 선원을 태우고 출항한다.
 
그러나 망망대해 위에서 그들이 실어 나르게 된 것은 고기가 아닌 사람이었다. 선장 철주는 삶의 터전인 배를 지키기 위해 선원들에게 밀항을 돕는 일을 제안한다.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온 수많은 밀항자들은 여섯 선원들과 운명의 한 배를 타게 되고, 그 와중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해무가 몰려오면서 이들은 걷잡을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읽어내는 데 있어서 "전진호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라는 배우 김윤석의 말은 결정적인 힌트가 된다.

이날 제작보고회에서 김윤석은 "시나리오를 직접 쓴 심성보 감독은 인간에 대한 섬세한 이야기라는 영화의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더라"며 "영화를 보고 나면 오랫동안 이야기 될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영화 '해무' 제작보고회가 1일 오전 서울 신사동 압구정 CGV에서 열린 가운데 왼쪽부터 배우 김윤석 김상호 유승목 이희준 박유천 한예리 그리고 심성보 감독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노컷뉴스 이명진 기자)
해무라는 커다란 위험에 맞닥뜨린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 줘야 했던 만큼 배우들의 면면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리라.

심 감독은 "돌이켜보면 무책임하게 시나리오만 던져놓았을 수도 있는데, 놀라운 집중력으로 캐릭터를 연구하는 배우들의 호흡이 너무 좋았고 그 에너지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며 "요즘 매일 후반작업을 하면서 그 연기를 볼 때마다 감동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어찌 보면 진지하고 무거울 것만 같은 이 영화의 이야기는 배우들의 호연 덕에 특별한 생동감을 얻게 된 분위기다. 여기에 이 영화의 제작자로 나선 봉준호 감독의 도움까지 얹어졌다.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를 쓰며 봉 감독과 인연을 맺고 이 영화로 연출 데뷔식을 치르는 심 감독은 "원작이 지닌 영화적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과정에서 봉준호 감독님이 상업 영화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가르쳐 주셔서 많이 공부했다"고 전했다.
 
봉 감독은 '설국열차'의 북미 개봉과 관련해 미국에 머무는 까닭에 이날 제작보고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해무는 두 배, 세 배 공을 들인 영화로서 자랑스런 마음으로 관객분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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