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연될 뻔했던 지하철 참사, 기본과 원칙이 막아냈다

지하철 3호선 방화, 불연성 소재와 신속한 초동 대처 덕에 참사로 안 이어져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수서동 서울메트로수서차량기지에 입고된 도곡역 화재 사고 열차 내부에 불에 그을린 자국이 남아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28일 오전 10시 51분쯤 서울 강남구 도곡동 지하철 3호선 도곡역에 진입하던 전동차 내에서 70대 남성이 불을 질러 자칫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는 것으로 확인된 가운데 화재 소식을 전해 들은 많은 시민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화재 발생 직후 경찰은 방화 용의자 조 모(71) 씨를 인근 병원에서 붙잡아 범행 동기 등을 추궁하고 있다.

사고 발생 상황이 대구 지하철 참사와 '판박이'인 것처럼 비슷했던 도곡역 화재가 대형 인명 피해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

◈ 객차 내 의자 등 불연성 소재로 교체가 주효

대구 지하철 참사 직후 전동차 내 의자 재질은 가연성 소재에서 스테인리스 등 불에 타지 않는 불연성 소재로 교체했다.

지하철 객실은 화재가 발생해도 승객들이 대피할 공간이 없다는 점, 그리고 소방 당국 접근도 용이하지 않은 지하라는 특수성 때문에 대형 인명피해 우려는 수차례 지적됐다.

경찰에 붙잡힌 용의자 조 씨는 이날 객실에서 시너로 추정되는 인화물질을 넣은 배낭에 불을 질렀다.

배낭의 불길이 제법 셌지만, 다행히 대구 지하철 참사 때와는 달리 객실 의자가 불연성 소재여서 화염이 주변으로 번지지 않았다.

2003년 2월 18일 오전 9시 53분에 대구 중구 남일동 중앙로역 구내에서 발생한 지하철 참사 때는 발화 전동차에서 붙은 불이 반대편 선로 열차까지 옮겨붙으며 인명피해를 키웠다.

가연성 소재로 된 의자 시트는 전 객실로 불길을 옮긴 것은 물론 유독가스까지 배출해 수많은 승객이 질식사했다.

당시 192명(신원 미확인 6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했다.


◈ 출장 가던 역무원 초동 대처에 시민도 합세

(사진=28일 오전 10시 51분 발생한 서울 지하철 3호선 도곡역 전동차 내 방화 관련, 해당 전동차에 타고 있다가 불을 발견하고 진압에 나선 서울메트로 소속 권순중 대리가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불이 난 객실 안에 출장 가던 서울메트로 소속 역무원 권 모(47) 씨가 타고 있었던 점도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매봉역에서 해당 전동차를 탄 권 씨는 마침 도곡역에 내릴 준비를 하다 "불이야"하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니 이미 배낭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권 씨는 반사적으로 객실 내 소화기 쪽으로 몸을 날렸고 이후 배낭에 소화액을 분사했다.

평소 훈련이 돼 있어 소화기를 가져다 실제 소화액을 분사하는 데까지 몇 초 걸리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린 권 씨는 "누가 긴급 비상벨 좀 누르고 119에 신고해줘요"라며 주변에 소리쳤다.

다급한 상황임을 알아챈 시민들이 합세해 소화기를 더 가져와 뿌렸고 이 중 일부는 긴급 비상벨을 누르고 119에 신고했다.

권 씨는 "경로석 사이에 놓인 두 개의 가방에서 불길이 치솟았다"며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시민들이 옆에서 도와줘 소화기를 분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권 씨는 또 "도곡역에 진입한 직후 대기하던 역무원들이 소화기를 들고 진입해 잔불까지 진화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전동차가 도곡역에 진입하는 2~3분 동안 신속하게 이뤄진 초동 대처가 자칫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질 뻔했던 아찔한 상황을 막았다.

◈ 비상벨 호출 후 바로 대피 방송

비상벨이 울림과 동시에 관제센터 보고와 대피방송을 한 것도 대구 지하철 참사 때와 달랐다.

서울메트로 관계자 등에 따르면 해당 전동차 기관사는 비상벨을 듣자마자 상부에 보고한 뒤 해당 전동차와 후행 열차 등을 정지시켰다.

또, 이 과정에서 대피 유도 안내방송을 내보내고 침착하게 승객들을 도곡역 승강장과 매봉역으로 유도했다.

28일 오전 10시 51분께 서울 강남구 도곡동 지하철 3호선 도곡역 전동차 객실 내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는 오전 11시경 역사 직원들에 의해 진화됐다. 이날 화재로 생긴 연기로 통제된 하행선 선로가 텅 비어 있다. 무정차 통과는 12시 20분께 해제됐다. (사지=박종민 기자)
전동차 객차 중 앞쪽 다섯 칸만 도곡역 승강장에 진입했고 뒤쪽 네 칸은 승강장에 진입하지 못한 상황.

기관사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인 도곡역 역무원들이 앞쪽에 타고 있던 승객 270명을 승강장을 통해 외부로 재빨리 대피시켰고, 뒤쪽에 타고 있던 100여 명은 안내방송에 따라 선로를 통해 매봉역으로 되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A(62.여) 씨가 선로를 따라 걷던 중 발목을 삐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큰 부상은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2003년 지하철 참사 때는 객실 내에 연기가 들어차는 상황임에도 많은 승객이 "곧 출발할 테니 기다려 달라"는 기관사의 안내방송만 믿고 객실에 머물다 소중한 목숨을 잃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 불감증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자칫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질 뻔했던 지하철 객실 내 방화 사건.

하지만 이번에는 잘 지켜진 기본과 원칙, 그리고 객차 의자를 불연성 소재로 바꾼 사전 대비가 소중한 시민들의 생명을 구했다.

실시간 랭킹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