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풀려난 지 40년, 1986년에 이 책을 출간하고 1987년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책이 그의 유서라고 불리는 이유다. 제목은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따왔다.
강제수용소 안에서 벌어졌던 현상들을 가해자와 피해자, 가라앉은 자(죽은 자)와 구조된 자(살아남은 자)로 명명하며 이들을 가로지르는 권력관계 등을 날카롭게 풀어냈다. 그가 후대에 전하는 수용소는 인간세계의 축소판이다. 같은 포로 입장이지만 자신보다 더 취약한사람을 자신의 권력 아래에 둔다. 폭력 체제에 노출된 인간이 어떻게 체제와 닮아가는지를 끔찍하게 보여준다. 생환자가 느끼는 치욕감과 죄책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아마 자살로 생을 마감한 레비 자신의 고통이기도 했으리라.
레비는 우치 게토의 위원장 하임 룸코프스키의 이야기를 통해 억압의 체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그 체제와 닮아가는지 생생하게 묘사한다. 실패한 기업가이자 유대인 자선단체들의 책임자로 알려진 룸코프스키는 사악한 방법을 총동원해 게토 위원장에 오른다. 그리고 절대 왕정의 군주를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는 점점 자신이 메시아이자 자기 민족의 구원자라고 확신하게 된다. 룸코프스키는 권력과 위신에 쉽게 현혹되는 우리 인간의 나약함을 표상한다. 레비가 보기에 이것은 역사 속에서 되풀이되는 광경이다.
레비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히틀러의 궁정에서, 살로 공화국의 장관들 사이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암투를 떠올린다. 그들 역시 회색 인간들로 처음에는 맹목적이었다가 나중에는 범죄자가 되었고, 죽어가는 사악한 한 줌의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맹렬히 싸웠다. 레비는 룸코프스키의 이야기가 곧 우리들의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79~80쪽)
레비에 따르면 생환자도 무조건 기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유를 되찾음과 동시에 치욕감과 죄책감에 휩싸였다. 자신들이 휩쓸려 들어간 체제에 대항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충분히 하지 않았다는 데 대한 죄책감이다.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운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98~9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