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인류 문명은 돌연변이는 물론 인간까지 무차별 살육하는 생명공학병기 센티넬 무리 탓에 폐허로 전락했다. 그나마 특별한 능력을 지닌 돌연변이인 엑스맨들이 결집해 센티넬에 대항해 보지만, 돌연변이 능력을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막강 전투력의 적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엑스맨들의 지도자격인 프로페서X(패트릭 스튜어트)와 매그니토(이안 맥켈런)는 과거에서 희망적인 미래의 답을 찾자는 데 뜻을 모은다. 이에 따라 울버린(휴 잭맨)은 과거로 시간여행을 보낼 수 있는 키티(엘렌 페이지)의 도움을 받아 센티넬이 처음 만들어진 때인 1973년으로 되돌아간다.
퓨처 패스트는 시작과 동시에 고통과 상실로 얼룩진 디스토피아를 관객들에게 들이민다. "진화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식의 내레이션으로 인류의 자성을 촉구하는 데도 망설임이 없다.
이 영화의 세련된 특수 효과는 남다른 능력을 지닌 엑스맨들의 활약상을 담아내는 맞춤형 그릇으로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엑스맨들과 센티넬들의 대결을 그린 오프닝 시퀀스는 그 달디단 열매다. 엑스맨 1, 2편을 연출한 뒤 11년 만에 다시 퓨처 패스트의 메가폰을 쥔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엑스맨의 세계관에 얼마나 능통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기존 SF 영화를 통해 익숙해진 이야기 구도를 빌려와 관객들의 이해 폭을 극대화한 점도 특징이다. '매트릭스' 속 현실과 가상, '인셉션'의 현실과 꿈의 경계를 이해한 관객이라면 과거와 미래라는 두 축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따라잡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미래의 센티넬은 '터미네이터2'의 액체금속 로봇 T2000을 닮았다.
다만 퓨처 패스트는 기존 '엑스맨' 3부작의 연장선이라기보다는 그 프리퀄격인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이하 퍼스트 클래스)의 속편에 가깝다. 극의 흐름을 퍼스트 클래스의 주역인 젊은 프로페서X(제임스 맥어보이), 젊은 매그니토(마이클 패스벤더), 미스틱(제니퍼 로렌스)이 이끌어간다는 점이 그 증거다. 미래의 축을 담당하는 엑스맨들은 과거 엑스맨들의 선택에 종속돼 있는 까닭에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다.
과거의 엑스맨 가운데 초음속으로 움직이는 퀵실버(에반 피터스)는 잠깐 등장하지만 특별한 잔상을 남긴다. 퀵실버의 관점에서 몹시도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관객들이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머러스한 영화적 체험이 될 것이다.
울버린이 되돌아간 1973년은 8년 넘게 이어지던 베트남전이 끝난 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베트남의 군인들이 부정적으로 묘사된 데는 당대 초강대국이던 자국에 쓰라린 패배를 안겨 줬다는 데 대한 할리우드식 복수가 작용했으리라.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 가장 싫어한다는 닉슨을 대하는 극과 극의 영화적 태도도 흥미롭다.
극중 두 차례 등장하는 서양식 장기인 체스는 각각의 말들을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지니고 있다. 체스판 위를 움직이는 말들처럼 엑스맨들은 각자의 목적의식에 따라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미래의 모습은 번번이 희망과 좌절 사이를 오가게 된다.
미래에서 프로페서X의 도움으로 존재 이유를 찾았던 울버린이 과거로 되돌아가 절망에 빠진 젊은 프로페서X를 구해낸다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변화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극 초반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때 우린 젊었고 이런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지"라고 후회막급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이 영화는 말한다. 젊은 프로페서X가 울버린을 통해 미래의 자신을 만나는 인상적인 장면처럼, 현실의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의 공명의 폭을 넓힘으로써 더 나은 미래의 자신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이 점에서 퓨처 패스트의 엔딩 시퀀스는 인류의 의식이 편협함에서 벗어나 한 단계 진보한 결과로 얻어질 유토피아를 그린 것으로 다가온다.
참고로 영화가 끝난 뒤 길고 긴 자막이 올라가고 나면, 엑스맨의 기원으로 돌아간 새로운 시리즈를 예고하는 쿠키 영상이 이어지니 놓치지 말 것을 권한다.
12세 이상 관람가, 134분 상영, 22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