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 SSU(해난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아침 8시. 대원들은 청해진함에 구비된 이송용 캡슐(PTC)을 타고 수심 88m 해저로 내려가 수색에 들어갔다.
PTC는 이번 세월호 사고 해역에 투입 여부를 놓고 논란을 빚은 ‘다이빙벨’보다 한참 앞선 장비다.
SSU가 로켓 잔해를 청해진 갑판에 올리는데 성공한 것은 인양작업에 돌입한지 8시간 반이 지난 뒤였다.
해군은 이와 별도로 군산 서방 160㎞ 해상에 떨어진 산화제통과 연료통, 엔진잔해 등 1단 추진체 잔해 14점을 7차례의 잠수를 통해 모두 인양했다.
이 작전에는 헬륨과 산소로만 구성된(질소가 포함되지 않은) 혼합기체를 활용한 심해잡수 기법이 활용됐다.
해군은 당시 1회 잠수에 평균 2점의 잔해를 건져 올릴 정도로 인양 작업은 효율적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또 혹한의 추위(영하 2~5℃)와 강한 조류(시속 0.9~1.3㎞), 짧은 시정(0.5~1.0m) 등 악조건 속에서도 부상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은 성공적인 작전이었다고 자평했다.
당시는 고압챔버를 이용해 압력을 조정한 이후 최대 300m까지 잠수가 가능한 포화잠수 기법이 동원됐다.
그 결과 147m 심해에 묻힌 잠수정이 인양됐다. 147m의 심해작전은 미 해군이 1990년대 초에 세웠던 수심 98m 선박 인양 기록을 깨트리고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당시 작전에는 수중무인탐사기(ROV)와 심해구조잠수정(DSRV) 등도 활용됐다.
세계를 놀라게 한 이 같은 대한민국 해군의 심해 구조 실력은 ▲1983년 다대포 간첩선 인양(수심 63m) ▲1993년 서해 훼리호 인양(수심 15m) ▲1998년 동해 적 잠수정 나포 및 인양(수심 40m) 등 풍부한 실전경험을 통해 축적된 결과였다.
이 밖에도 해군 SSU의 작전은 ▲2002년 참수리 357호 인양(수심 27m) ▲2003년 합천호 추락헬기 인양(수심 30m) 작전 등에서도 빛을 발했다.
다양한 실전경험을 통해 쌓은 노하우와 실력으로 무장돼 살아있는 전설이 된 SSU가 왜 이번 세월호 참사 때에는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일까?
해군은 우선 TPC의 경우 사고 해역의 강한 조류 때문에 투입을 못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왜 물살이 약한 소조기 때는 투입을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있다.
해군의 소극적인 활동과 관련해서는 세월호 수색 작전의 지휘권을 해경이 가지고 있는 상황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이 관계자는 이어 "세월호 선체 수색 외에도 다양한 수색임무를 해경이 모두 관장하고 있는데 지금 와서 이를 해군이 가져오게 되면 그동안에 모인 정보들이 모두 단절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돼 오히려 효율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직 SSU 대원은 "해당지역이 재난지역으로 선포됐으면 준 전시상황 아니냐"며 "국민의 군대가 이런저런 눈치를 보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구조 전문가는 "굳이 1군 선수를 놔두고 2군 선수를 앞세워 작전을 벌이고 있다"며 "참으로 한심한 상황이다"고 일갈했다.
그는 이어 "청와대나 총리실 같은 윗선에서 컨트롤을 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한 결과"라며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