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아 기자(이하 신): 현빈의 화난 근육으로 화제를 모은 이 영화는 그가 연기한 정조에 대해 조금 알고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좀 더 흥미롭게 볼 수 있고 다소 불친절할 수 있는 이 영화의 시작을 무리없이 따라잡을 수 있다.
이진욱 기자(이하 이): 최근 만난 한 저명한 역사학자는 세종과 함께 정조를 조선의 500년을 있게 한 왕으로 꼽았다. 개혁군주로 손꼽히는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 만큼 위세를 떨친 노론 벽파의 노골적인 위협 속에서도 기울어가던 조선을 중흥시킨 임금으로 평가받는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밤새 책을 읽은 덕인지 대신들을 꼼짝 못하게 할 만큼 학문에 통달한 대학자인데다, 아버지만큼 무예에도 능통했다. 극 초반에는 정조의 이런 성격이 은유적인 대사와 장면들로 잘 드러난다.
신: 현빈의 화난 근육은 그러니까 관객을 현혹하기 위한 노골적인 장치가 아니고 '문무에 능한 왕'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1석 2조다.
이: 실제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봤고, '역적의 아들'이라는 족쇄에 세손 시절부터 언제 암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된 그가 사적 트라우마와 복수심을 어떻게 정치로 승화시켰을까? 정조의 사람됨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뜻하는 바가 크다. 영화 역린도 이 부분을 건드리고 싶었던 듯하다.
신: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가짜 왕을 내세워 이상적인 리더의 모습을 꿈꿨다면 역린은 실제로 내적 갈등과 외적 위협을 극복하고 올바른 정치를 펼쳤다는 점에서 올바른 리더가 부재한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의 절실한 희망을 담았다. 다만 영화가 너무 시종일관 무겁고 진지하다보니 관객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신: 정조를 중심으로 왕의 그림자인 상책(정재영), 금위영 대장 홍국영(박성웅), 생모 혜경궁 홍씨(김성령), 당시 조선의 실권이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한지민), 킬러로 길러진 고아 출신의 살수(조정석), 비밀스런 나인(정은채)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상책과 역할이 겹치는 살수를 제하면 인물들이 제법 잘 살아 있다. 특히 정순왕후를 연기한 한지민과 군권을 장악한 구선복 역할의 송영창 연기가 인상적이다.
이: 정조와 살수는 빛과 그림자처럼 대척점에 서 있으나 둘 다 길러진 존재라는 점이 흥미롭다. 한 명은 숨막히는 법도를 따라야 하는 왕으로, 나머지는 청부살인을 해야 하는 살수다. 이 둘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삶을 대하는 자세를 주의깊게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시대의 노예가 될 것을 강요받던 이들이 주인으로 거듭나고자 어떻게 투쟁하는지를 말이다.
신: 일례로 나인 월혜가 왕의 친모에게 "우리 같은 것들은 그냥 불쏘시개로 쓰고 버리면 그만인가요"라고 던지는 대사라든가 그녀의 선택이 흥미롭다. 정조가 상책에게 "언제 너의 마음이 바뀌었냐"고 묻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이: 살수의 경우 권력다툼을 벌이는 '윗분'들의 필요에 따라 어릴 때부터 조직적으로 길러지는 것으로 나온다. 그 조직의 두목 광백(조재현)은 살수들의 이름을 지우고 번호로 부름으로써 그 위에 군림한다. 그렇게 그들은 권력 유지의 도구로서 소비되고 또 소비된다. 무서운 함의를 품은 이러한 설정들은 하나 하나 정성을 들인 듯 꼼꼼하게 다듬어져 있다.
이: 하루라는 한정된 시간을 다루는 데 어려움이 컸던 것일까. 후반부 인물간 갈등이 급격하게 해소되는 경향이 있다. 전반부에서 차곡차곡 쌓아 온 동력을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인물상을 길어 올리는 데 제대로 쓰지 못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신: 정조 암살 시도 2, 3시간 직전부터 절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긴장과 이완의 호흡이 약하다보니 절정이 절정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또 정조가 암살 위협을 어떻게 이겨내는지가 중심인 영화가 아니라 그 대처가 즉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극 초반과 달리 말미에 가서는 밥과 반찬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 앞에까지 가져다 주려는 듯 몹시 친절하다. 물론 영화의 주제 의식을 보다 뚜렷하게 하기 위함이었겠지만, 관객 각자의 열린 해석을 방해함으로써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 세련된 영화적 함의를 놓쳐 버린 셈이다.
신: 마지막에 미화로 느껴질 정도로 과한 측면이 있다. 안방극장의 스타감독인 이재규 감독의 진심과 노력이 느껴지나 그 이름만큼 아쉬움이 남는 스크린 데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