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조선왕조실록'과 시골 선비의 '분투'

[임기상의 역사산책 ⑯]시골 선비들, 실록과 태조 어진을 지키다

◈ 임진왜란 발발…조선왕조실록 가까스로 피신하다

전주사고 실록각. 시골 선비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에 4대 사고 중 유일하게 전란을 피했다. (사진=사진작가 김성철 제공)

조선태조 어진. 전주사고 옆에 있는 경기전에 보관하던 중 임진왜란을 만났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선조 25년(1592년) 4월 13일 아침 8시경.

왜선 7백여척에 탄 조선침략 선봉군 제1진 1만 8,700명이 부산에 상륙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왜군은 북상하면서 닥치는대로 살인, 방화, 약탈을 저질렀다.

이 와중에 한양의 궁궐에 있는 춘추관, 충주, 성주에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이 모두 불에 탔다.

유일하게 왜군이 들어가지 못한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아 있었다.

전주사고에는 실록을 비롯해 <고려사>, <고려사절요>등 모두 1,344책이 보관되고 있었다.

또 전주사고 옆에 있는 경기전에는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의 어진이 걸려 있었다.

그해 6월 왜군 제6진이 성주, 금산, 남원을 거쳐 전주로 진격하고 있었다.

왜놈들이 몰려온다는 소식에 경기전 참봉 오희길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실록과 어진을 산속 깊숙한 곳으로 옮기려면 말 20여필과 많은 인부들이 필요한데..."

그의 머리 속에 이 지역사회에서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 명망이 있었던 전라도 태인에 사는 유생 손홍록이 떠올랐다.

바로 달려가 간청했다.

"나라의 역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실록을 보관해야 하는데, 저 혼자서는 역부족입니다. 부디 뜻을 같이 하십시다"

손홍록은 흔쾌히 동의하고 학문을 같이 했던 고향친구 안의와 함께 하인 30여명, 수십마리의 말을 데리고 전주로 달려갔다.

이때 손홍록의 나이는 58세, 안의의 나이는 64세로 고령의 노인들이었다.

오희길은 실록을 숨길만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정읍 내장산의 은봉암이 적격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 세 사람은 태조부터 명종 때까지 13대에 이르는 180년의 기록을 47개 상자에, <고려사> 등 다른 서책을 15개 상자에 담아 수십개의 수레에 싣고 전주를 떠났다.

◈시골 선비들, 산속 깊숙한 곳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실록을 지키다.
내장산 용굴. 임진왜란 때 태조 어진을 숨겼던 용굴암으로 추정된다. (사진=정읍시 제공)
은봉암에 도착한 것은 이레만인 1592년 6월 22일.

다음날에는 태조 어진과 제기들을 용굴암으로, 다음달 14일에는 실록을 더 깊숙한 곳인 비래암으로 옮겼다.

이들은 책들을 일일히 지게에 지고 한발 한발 내딛으며 산으로 올라갔다.

지금도 용굴로 올라가는 길은 험난해서 난간에 의지해야 오를 수 있다.

이들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영은사(현 내장사)의 희묵스님과 무사 김홍무, 이름없는 사당패에 이르기까지 자발적으로 나선 100여명과 함께 실록을 지켰다.

이렇게 실록과 어진을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보관했던 기간은 14개월에 달한다.

후일 안의가 쓴 <난중일기초>에는 안의와 손홍록이 함께 자리를 뜨지 않고 실록을 지킨 날이 53일, 안의가 혼자 지킨 날이 174일, 손홍록이 혼자 있는 날이 143일이었다.

◈곳곳을 전전하다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진 조선왕조실록

전라감사 이광은 의주에 피난가있는 선조에게 태조 어진과 실록을 내장산에 잘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선조는 크게 기뻐하며 병조좌랑 신흠을 내장산에 보내 관헌들을 동원해 정읍으로 옮기도록 명했다.

이후 실록은 왜군을 피해 아산으로 옮겼는데, 이때도 안의와 손홍록은 사재를 털어 식량과 말을 준비해 실록을 지켰다.

정유왜란이 발발하자 실록은 황해도 해주~강화도~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진다.

안의는 실록이 아산을 떠난 직후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와 생을 마친다.

남은 손홍록 일행은 실록이 묘향산에 도착할 때까지 5~6년간 실록과 동행한다.

전쟁이 끝난 뒤 조정은 안의와 손홍록에게 종6품의 벼슬을 내렸다.

이 포상은 민간인에게 내려진 최상급의 벼슬이다.

지금도 전북 정읍에는 안의와 손홍록의 위패를 모신 '남천사'라는 사당이 남아 있다.

남천사.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안의와 손홍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사진=사진작가 김성철 제공)
◈다시 출판된 조선왕조실록...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주사고본을 원본으로 실록을 4개 더 출판했다.

그리고는 지역을 안배해 궁궐의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 평안도 영변 묘향산, 경상북도 봉화 태백산, 강원도 평창 오대산 등 5곳에 분산 배치했다.

태백산사고 내부의 모습.일제 때 일본인이 만든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이다. 실록을 보관하던 궤짝이 보인다.
이후 이괄의 난,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제각기 수난을 당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끝나자 대한민국에는 서울대학교에 있는 정족산 사고본과 국가기록원이 갖고 있는 태백산 사고본만 남았다.

나머지 오대산 사고본과 적상산 사고본의 행방은 묘연했다.

◈홀연히 도쿄대학교에 나타난 오대산 사고본


2006년 7월 인천국제공항에 특별한 화물이 도착했다.

전 국민의 관심 속에 돌아온 화물은 일제 때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대지진 속에서 살아남은 오대산 사고본 47책이었다.

93년만의 귀향이다.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소실된 오대산 사고. 최근 복원이 되었다. (사진=평창군 제공)
오대산실록은 1913년 강탈당해 도쿄대로 넘어갔다가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됐다.

그러나 개인이 대출받아 집에 보관하던 47책이 살아남았다.

이 소식을 접한 종교계,학계,정계 인사들이 '조선왕조실록 환수위원회'를 구성해 끈질기게 반환을 요청한 끝에 서울대 개교기념일에 맞춰 돌려준 것이다.

일본은 이를 돌려주면서 끝까지 '반환'이 아니라 '기증'이라고 주장해 국민적 공분을 샀다.

'기증'이란 용어를 고집하는 건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강탈한 실록이 도쿄대 재산이란 걸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북한으로 넘어간 적상산 사고본
북한 사회과학원 민족고전연구소가 남한보다 먼저 국역해 펴낸 '리조실록'
한국전쟁이 발생한 직후인 1950년 7월 초.

북한 수뇌부는 서울의 한 도서관 먼지구덩이 속에 나뒹굴고 있는 적상산 사고본 1,800여권을 평양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 실록은 묘향산 사고에 있던 것이 전라도 적상산을 거쳐 일제시대에 서울 장서각으로 옮겨진 것이다.

최고사령부는 군사작전도에 '리조실록 구출 노정'을 그려넣고 수송을 담당할 군용차량들을 배치했다.

이 차량들은 미군 폭격기를 피하기 위해 밤에만 이동하면서 실록을 평양으로 옮겼다.

더 이상 폭격할 목표물이 없다는 평양에서 실록이 살아남은 건 기적같은 일이다.

전쟁이 끝난 후 북한에서는 벽초 홍명희의 장남인 홍기문 사회과학원 부원장의 진두지휘 아래 실록의 번역작업이 진행되었다.

드디어 16년만인 1991년 번역본 '리조실록' 400권이 출간되었다.

남한의 한글본 413권보다 3년 앞선 것이다.

번역의 주체가 누구이든간에 전쟁의 불길을 피해 귀중한 우리의 문화재가 살아남은 건 다행스런 일이다.

살아남은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로 지정된데 이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

이 방대한 저서를 볼 때마다 외적의 침입 앞에서 사재를 털어 실록을 옮기고 밤새 교대로 숙직을 서던 그 전라도의 유생과 이름없는 백성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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