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대로 빨간 알약을 먹으면 가상 세계에서 깨어나 생생한 현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각오해야 한다. 현실은 사람을 한낱 연료로 써먹는 잔혹한 시스템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 세계를 바꾸는 것은 오롯이 현실을 직시하게 된 당신의 몫이다. 그대는 파란약과 빨간약 중 무엇을 선택할 텐가.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된 주인공에게 주어진 선택의 순간이다. 이 상황이 한국 영화 '10분'에서도 그대로 재현된다. 차이가 있다면 매트릭스는 SF 장르의 힘을 빌려 체제의 비뚤어진 실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반면, 10분은 현재를 사는 우리네 모습을 가감 없이 비추는 정공법을 택해 시대의 민낯을 드러낸다는 정도다.
방송사 PD 시험을 본 호찬(백종환)은 결과를 기다리며 곧 지방으로 이전할 공공기관인 한국콘텐츠센터의 6개월 인턴사원으로 입사한다. 허드렛일은 물론 야근에 부서 주말등산까지 동행하면서 성실성을 인정받는 그에게 부장과 노조지부장이 정규직을 제안한다. 갑작스런 결원으로 직원을 채용해야 하는데, 자기들이 호찬을 밀어주겠다는 것이다.
호찬의 머릿속에서 명퇴 뒤 번번히 사업에 실패한데다 몸까지 성치 않은 아버지, 보험 일로 실질적인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어머니, 미술학도를 꿈꾸는 고3 남동생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인턴 입사 면접에서 "돈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라고 말했던 호찬은 '쉽게 살자'는 마음으로 채용공고에 응시한다. 사무실 직원들도 그런 호찬의 채용을 당연시 여긴다. 호찬은 그동안 정리해 둔 PD시험 준비 자료까지 여자친구에게 넘기고는 안정된 직장으로의 입성을 고대한다.
그런데 원장의 빽으로 엉뚱한 여직원이 입사하면서 호찬의 삶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는다. 신입 여직원은 놀라운 친화력으로 노조차원에서 문제 삼겠다던 노조지부장을 비롯해 낙하산 신입을 비난하던 직원들을 구워삶는다. 자기 쪽으로 상황이 기울기를 바랐던 호찬은 결국 한낱 인턴으로 남아 외톨이 신세가 된다.

주인공 호찬이 6개월짜리 인턴 입사 면접을 보는 순간부터 그 기간을 조금 남겨둔 때까지, 불과 수개월간의 기록 중 결정적인 장면 장면을 추려내 90여 분으로 압축한 이 작품의 영화적 재미는 상당하다.
에피소드 하나 하나의 무게를 차곡차곡 쌓아 오다가 아수라장이 된 횟집 시퀀스에서 와르르 무너뜨린 뒤, 엔딩 시퀀스에서 선택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 두는 이 영화의 문법에는 특별한 진정성이 묻어난다.
영화 10분은 놀랍도록 예민한 동시대성을 품은 작품이다. 주인공 호찬을 바짝 따라다니며 특별한 움직임 없이 롱테이크(하나의 숏을 끊김없이 담아내는 촬영법)로 담아낸 일상의 풍경은 우리네 삶을 그대로 비춘다.
소위 삼포세대로 불리는 청년들의 출구 없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는 있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의 모습에서 결국 그들 모두가 막강한 힘을 지닌 시스템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극중 어느 누구도 특별히 선하거나 악하지 않게 그려졌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다.
시계 초침 소리가 흐르는 가운데 진행되는 엔딩 시퀀스는 구성원들을 좌지우지하는 사회 시스템의 실체를 드러내는 촌철살인의 우화다.
자신들이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몹시 달갑잖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지못해 따르고 있는 사무실 사람들. 그들로부터 단절돼 그 장면을 빠짐없이 지켜보는 호찬의 눈을 통해 관객들은 현실에 대한 특별한 자각을 얻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극중 호찬이라는 개인의 삶에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이유는 그것이 이미 우리의 보편적인 삶이 된 까닭이리라. 있는 그대로를 비춤으로써 관객들 스스로 시대의 자화상을 그려볼 수 있는 자유를 주는 이 작품은, 이 시대 영화라는 매체의 가치를 새삼 일깨우는 단비로 다가온다.
12세 이상 관람가, 93분 상영, 2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