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7월 초파일인 8월 20일은 고헌 박상진 의사의 기일이다. 박상진 의사의 봉사손(제사를 받드는 자손)은 5대손인 박성환(23·부산대 3학년·부산 남구 대연동)씨. 작년까지는 4대손 박대훈씨가 제사를 모셨지만 지난 3월 폐암으로 숨진 탓에 올해부터는 그의 아들이 봉사손이 됐다.
이날 제사는 직계가족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치러졌다. 항일투쟁사를 대표하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의 제사에 가족 외에는 참석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세월의 무상함을 입증해주고 있었다.
제사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 위치한 봉사손의 집 문턱을 넘으며 마음이 숙연해진 것은 고색창연한 고택의 기왓장이나 명문가의 족보 때문은 아니었다.
천석지기의 재산을 몰수당한 채 가문의 몰락을 겪어야 했던 모진 세월 속에서도 조상의 기개를 자랑스러이 간직한 후손들의 자존심은 30여평 남짓한 소박한 아파트에서도 꼿꼿하게 살아있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가난하다
박상진 의사의 부인인 최영백은 남편의 순국 소식을 듣고는 정신을 놓았다. 남편 뒤를 따라 죽으려는 심산으로 씻지도, 먹지도 않다 결국 정신까지 놓은 것. 그러던 중 손자 박위동이 태어났고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최영백의 친정은 경주 최부잣집으로, 친정아버지 최현교는 ''''네가 이대로 죽으면 네 자식들을 돌보지 않겠다. 그래도 좋으냐''''고 나무라기도 했다.
최현교는 사위 식솔들의 임시거처를 자신의 집 근처인 경주 교동 교리에 마련해주고 살뜰히 거두기도 했다.
최영백은 83세로 숨을 거두기까지 손주들이 잘못하면 ''''이놈들, 너희들이 어느 어른의 자손인데 그렇게 행동하느냐''''며 호되게 야단쳤을 정도로 남편의 정신을 높이 샀다.
박상진 의사의 순국 이후 그의 식솔들은 경주 녹동집에서 3년을 더 살다 1924년께 경주 교남으로 이사했다. 박상진 의사의 장인인 최현교가 마련해준 임시 거처였다. 그러다 1930년께 생가가 있는 울산 송정동 서당으로 거처를 옮겨 부산으로 떠나기 직전인 1957년까지 생활했다.
당시 박상진 의사의 식솔들은 논 다섯마지기와 문중 밭 너댓 마지기를 빌려 채소를 기르며 가까스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의 순국 직후 태어난 손자 박위동은 우장춘 박사로부터 건네받은 배추씨 종자로 배추농사를 지었고 이밖에도 양파, 양배추, 고추 등 채소를 키워 시장에 내다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박상진 일가가 부산으로 이주한 것은 생계 때문. 처음 자리잡은 곳은 진구 부암동으로 4대는 그곳에서 양계를 시작했다.
박상진 의사의 외아들인 박경중은 닭도둑을 지키느라 닭장 옆 작은 창고를 방으로 개조해 밤을 지샜다. 그나마도 상이 군사들과 도둑의 잦은 ''''방문''''으로 양계를 오래할 수도 없었다.
양계를 그만두면서는 인근 당감동으로 이사했다. 이 때 박위동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조선견직에 취직했다. 일제치하에서는 ''''사상범''''의 일족이라는 이유 때문에 취직은 엄두도 내지 못했었지만, 뒤늦게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배려로 취업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지금의 남구 대연동 아파트는 박정희 대통령이 독립유공자의 후손을 위해 이곳에 광복촌을 조성하면서 이주할 수 있었다.
박상진家는 대대로 이퇴계의 학맥을 이어온 전통유림의 후손들이지만 가문의 몰락으로 끼니마저 연명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제대로 공부하지 못했다.
박위동은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했고, 사정은 그의 아들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위동의 셋째아들(박중훈·54)과 막내아들(박필훈·49)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장학금으로 각각 상고와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지만, 큰아들(박대훈)과 둘째아들(박정훈·57)은 고교에 진학하지 못한 채 중학교를 겨우 졸업해야 했다.
박상진 의사의 손주며느리인 이갑석(85) 할머니는 ''''시집온 지 사흘 만에 양식이 떨어졌었어. ''''이제 어째 살꼬''''하는 걱정에 가슴이 내려앉았어''''라며 ''''먹고살기도 힘들었던 시절에 제사 한 번 지내려면 돈이 있어야지. 그 때마다 폐물이며 장롱을 하나씩 팔아 제수음식을 장만했어. 제삿날이면 방은 집안 어른들에게 내주고 아이들은 마당에 멍석깔고 모깃불 피워놓고 잠을 청했어.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자식들을 많이 공부시키지 못한 게 한이 돼''''라고 가슴을 쓸었다.
◆박상진家의 손맛, 내림음식
이 댁의 내림음식은 제사를 마친 후 나오는 나물 비빔밥이다. 제사상에 올랐던 고사리며 호박, 콩나물 등의 나물을 밥에 비벼 내놓는데 옛날 세간살이를 팔아 제수음식을 장만해야할만큼 가난했던 시절, 제사에 참석한 친족들에게 푸짐하게 대접하기 위해 증조할머니가 고안해 낸 방법일 것이라는 게 후손들의 추측이다. 또 다른 내림음식은 칼국수. 칼국수는 박상진 의사가 살아생전 좋아했던 음식으로, 그의 부인인 최영백이 생존할 때까지는 제사상에 어김없이 올랐다.
이갑석 할머니는 ''''우리집 칼국수는 반죽할 때 밀가루에다 생콩가루를 섞어. 그러면 칼국수 면발이 요즘 소면처럼 얇게 밀린다고. 여기에다 고추장에 묻어놓은 빨간 무장아찌하며, 달걀 노른자로 부친 노란 지단이며, 실고추, 생오이, 부추 따위를 고명으로 얹는데 때깔이 어찌나 곱던지''''라며 회고한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라 지금은 제사상에 칼국수를 따로 올리지 않고 소면으로 대신하고 있다고.
하지만 떡 만큼은 직접 빚는다. 이 날도 이갑석 할머니와 네 며느리들은 녹두 속을 넣어 송편을 빚고, 경단에 노란 고물을 입히고, 화전을 지지느라 분주했다.
전에는 모시 잎을 직접 따서 만든 모시떡이며, 소나무 껍질을 벗겨 빚은 송기떡 등 가짓수가 더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