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
① ‘포스트’ 김연아-이상화-이승훈…“이미 늦었다” ② 한국 스포츠외교력 무능, 이젠 ‘좌절’ ③ "평창올림픽, 어떻게 유치한 것인데…” |
한국 빙속 역사 102년의 숙원을 풀었고 한국 동계스포츠의 새 역사를 쓴 순간이었다.
한국 빙속 사상 첫 금메달은 물론, 어느 국가도 해내지 못했던, 동계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남녀 500m를 동반 우승한 첫 국가가 되었다.
또 아시아 선수로는 불가능하다는 장거리에서, 아시아 최초로 메달을 따내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경사였다.
이 모든 것이 세계 최초였고 아시아인으로서 처음이었고 한국스포츠 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오랫동안 동계스포츠 아시아 맹주로 군림했던 일본이 금메달을 하나도 따지 못한 반면, 김연아의 피겨 우승과 함께 한국은 금 6개를 비롯, 모두 14개의 메달을 따내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남녀 스피드스케이팅 500m에서 금메달을 따낸 모태범(25, 대한항공), 이상화(25, 서울시청)와 5000m 은메달, 1만m 금메달의 주인공 이승훈(26, 대한항공)은 모두 20대 초반 한국체육대학교 07학번 3학년 친구들이었다.
이승훈과 모태범은 어릴 적부터 둘도 없는 친구고, 이상화는 여자 선수지만 그동안 남자 선수들과 훈련을 해왔다. 이상화는 금메달을 목에 건 후 "남자 선수들과 같이 훈련하면서, 앞서 뛰면 따라가려고 노력했고 격려가 큰 힘이 됐다"는 말을 했다.
세 명의 친구들이 서로에게 조언도 해주고 긴장도 풀어주면서 모두 최고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한국 빙상이 어른들의 파벌 싸움으로 얼룩졌을 때도 오히려 어린 선수들은 이렇듯 똘똘 뭉친 것이다.
우리의 어린 선수들은, 당시 이념으로, 지역으로, 세종시 등 정국현안으로 갈라져 싸우는 어른들에게 보란 듯이, 힘을 합해 한민족의 기상을 유감없이 펼친 것이다.
1992년 알베르빌동계올림픽에서 첫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쇼트트랙의 김기훈이 개인 1000m와 5000m 단체에서 금메달 2개를 획득하기 전까지 한국은 1924년 프랑스 샤모니 제1회 동계올림픽 이후 68년 간 단 한 개의 메달도 따내지 못했다.
스피드스케이팅과 피겨는 한국 동계스포츠에 있어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동계스포츠 종목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피겨 여자 싱글의 경우, 김연아(24) 이전에 '한국 피겨'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밴쿠버대회 전까지 역대 동계올림픽에서 한국 선수가 피겨 여자 싱글 본선에 올랐던 건 지난 2002년 솔트레이크올림픽 때 박빛나가 유일했다. 당시 쇼트프로그램에서 30명의 선수 중 26위를 기록, 프리스케이팅 진출이 무산된 바 있다.
스피드스케이팅 역시 이전까지 1992년 알베르빌대회 김윤만의 1000m 은메달, 2006년 토리노대회 이강석의 500m 동메달이 전부였고 특히 장거리는 아예 근접할 수 없는 종목이었다.
밴쿠버의 기적에 이은 평창의 2018년 대회 유치 성공으로 이번 소치올림픽은 한국 동계스포츠의 계속된 발전과 ‘평창’의 성공적인 대회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중요한 대회였다.
한국은 소치에서 금 3, 은3, 동 2개의 성적을 올렸지만 금 6개를 비롯 모두 16개의 메달을 따낸 밴쿠버에 비해 저조했다.
더 큰 문제는 4년 뒤 홈에서 치러지는 평창 대회다. 김연아는 이미 은퇴를 선언했고 이상화는 출전 의사를 유보하고 있다.
밴쿠버 금메달의 기적을 이뤘던 모태범과 이승훈은 이번 대회 각각 500m, 1000m와 1만m, 5000m에서 똑같이 4위와 12위에 그쳤다. '평창'에 대한 각오를 보였지만 서른에 접어드는 나이에 정상 탈환을 장담할 수 없다.
한 마디로 연결고리가 없다. 최근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주니어세계선수권에서 6위에 올랐던 최다빈(14·강일중), 동계체전 우승자 박소연(17·신목고), 소치올림픽 프리컷을 통과했던 김해진(17·과천고) 등이 '포스트 김연아'로 오르내리고 있지만 아직 역량이 떨어진다. 김연아는 16세였던 2006년 이미 주니어 선수권에서 정상에 올랐다.
이상화가 은퇴하고 나면 뚜렷한 대안이 없는 스피드스케이팅도 '평창'까지 뛰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으나 희망사항일 뿐이다.
발 빠르게 '소치'에서 드러난 문제점을 분석하고 자기 개혁 방안을 제시해야 했지만 한국 스포츠의 본산인 대한체육회는 물론 대한빙상경기연맹 등은 정부의 특별 감사 후폭풍 속에 폐막 후 한달이 지나도록 침묵만 지켰다.
여론에 떠밀린 빙상연맹은 지난 17일, 안현수의 귀화 등 대표 선수 선발 과정의 비리 의혹을 받았던 전명규 부회장이 소치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고 '빙상발전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개혁안을 내놨다.
'평창 키즈'는 이미 힘빠진 해당 연맹에만 맡기면 안 된다. 정부가 함께 나서야 한다. 알려진 유망주 외에, 이들의 경쟁자들을 육성해 전체적인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 '평창'의 열기를 자치 단체나 실업팀과 연계시켜 소질있는 꿈나무들을 지원해야 한다. 동계스포츠 선진국이 오래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육성학교도 그 대안이 될 것이다.
2012년 유스올림픽을 창설하면서 각국의 유망주 발굴을 독려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도 발을 맞춰야 한다. 물론 피겨 전용 링크 한 개도 없는 국내 저변 환경으로는 어린 선수들의 열정을 쫓아갈 수 없다.
겨우 약관이거나 갓 넘었던 어린 선수들은 밴쿠버에서 동계스포츠 강국의 발판을 마련해줬다. 그들이 피땀 흘려 얻어낸 세계 정상을 계속 지켜나가야 하는 것은 이제 어른들의 몫이다. 또 그것이 국민에게 자긍심을 준 선수들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