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 충돌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나는가 했던 크림 반도가 러시아와의 합병 문제로 또다시 들끓을 전망이다.
크림 자치공화국 의회는 이날 비상회의에서 크림의 러시아 귀속을 결의하고 이에 대한 찬반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오는 16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당초 자치공화국 주권확대 문제를 오는 30일 주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한 데서 크게 앞서 나간 새로운 결의다. 우크라이나 내에 머물면서 자치권을 확대하겠다는 게 아니라 아예 우크라에서 벗어나 러시아 연방의 일원이 되겠다는 것이다.
크림 전체 주민의 약 60%가 러시아계인데다 크림 지역이 역사적으로도 오랜 기간 러시아에 속해있던 점, 크림 주민의 상당수가 키예프에 들어선 친서방 성향 중앙정부에 반감을 갖고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주민투표가 예정대로 실시되면 찬성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크다.
크림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니키타 흐루시초프 전(前)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지난 1954년 크림 지역의 제정 러시아 복속 300주년을 기념해 친선의 표시로 소련 내 러시아 공화국에 속했던 이 지역을 우크라이나 공화국에 넘긴 뒤 지금까지 자치공화국 지위를 유지해왔다.
크림엔 여전히 러시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우크라 중서부 지역과는 달리 주민의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크림 내 친러시아계 주민들은 중앙 정부를 장악한 중서부 지역 세력을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은 쿠데타 세력으로 규정하고 협상조차 거부하고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유럽과의 통합 노선에도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크림 자치공화국은 키예프에 새 정권이 들어선 뒤 중앙 정부의 지시를 받지 않는 독자 정부와 의회를 구성하고 현지 사법기관과 대부분의 군부대 등을 휘하로 끌어들였다. 이미 사실상 독립국의 형태를 갖춘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분위기를 미뤄볼 때 주민투표 결과는 당연히 러시아로의 편입에 찬성하는 견해가 다수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러시아가 크림 자치공하국의 결정을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크림 내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개입까지 추진했지만 크림을 완전히 자국으로 병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푸틴 대통령은 그동안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서방 지도자들과의 대화에서 우크라의 영토적 통일성이 훼손돼선 안 된다는 입장을 줄곧 표명해 왔다.
주권 국가의 일부를 복속시켰다는 국제사회의 강한 비판과 반발을 무릅쓰면서까지 합병을 시도하기엔 러시아의 부담이 너무 커 보인다. 우크라이나 중앙정부는 벌써 크림 의회의 결의를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크림이 러시아로 귀속될 경우 역시 친러시아 성향이 강한 우크라 동부 지역에 합병 도미노 바람이 불 공산도 크다. 이같은 상황 전개는 어떻게든 국가 분열을 막아야 하는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와 러시아의 전면 대결을 의미한다. 무력 충돌 가능성도 한층 커질 것이다.
러시아는 지난 2008년 조지아(러시아명 그루지야)와의 전면전 이후 조지아에서 분리·독립을 선포한 친러시아계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의 주권국 지위를 인정하고도 끝내 두 지역을 러시아로 합병하지는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크림 의회의 이날 결의와 관련한 보고를 받고 즉각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해 관련 문제를 협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회의 결과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러시아 의회도 크림 합병 문제에 조심스런 태도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 하원은 앞서 일부 의원들이 제출한 외국 영토 병합 절차 간소화 법안을 내주 심의하겠다는 계획을 전하면서도 크림 합병 문제는 크림 자치공화국 주민투표 결과를 지켜본 뒤 본격 논의할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하원 독립국가연합(CIS·옛 소련권 국가모임) 문제 담당 위원회 위원장 레오니트 슬루츠키는 "이 문제의 결정은 (일차적으로) 러시아 지도부의 권한 사항"이라며 푸틴 대통령의 뒤로 숨는 모습을 보였다.
상원도 서둘러 크림의 러시아 합병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상원 우크라이나 상황 감시위원회 위원 발레리 슈냐킨은 "아직 주민투표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서방을 비롯한 관련국들을 당황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며 유보적 견해를 표시했다.
현재로선 크림 자치공화국이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로의 편입 결정을 내리더라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영토적 통일성을 존중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를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대신 러시아는 이런 상황을 우크라이나 중앙 정부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압박 수단으로 이용하려 들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