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흑해함대의 모항이기도 한 세바스토폴은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가 이곳에 군항을 정한 직후 세바스토폴로 명명한 곳으로, 부동항을 찾아 남진을 기도한 러시아와 이에 맞선 오스만투르크-영국-프랑스-프로이센-사르데냐 연합군이 크림 반도와 흑해를 둘러싸고 벌인 크림전쟁(1853∼1856)의 무대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패전으로 끝난 이 전쟁은 '백의의 천사'의 대명사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러시아혁명 후 내전 기간에는 레닌의 적군에 반기를 든 독일. 프랑스군 주축의 반혁명군에게 점령됐다가 다시 탈환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사에서 세바스토폴이 현대사에서 유명해진 계기는 2차 세계대전 초기인 1941년 10월 30일부터 이듬해 7월 3일까지의 공방전이었다. 이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2차대전 당시 소련군의 대독(對獨)방어전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1941년 6월 22일 '바바로사'라는 작전명과 함께 소련에 대한 침공을 감행한 독일군은 애초에는 크림반도 점령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세바스토폴에 주둔한 소련 공군기에 의해 독일군 진공에 중요한 루마니아의 정유시설이 파괴된데 분노한 최고 실권자 히틀러는 우크라이나와 크림반도를 함락시키라는 특별 지시를 내렸다.
이에 에리히 폰 만슈타인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 제11군(9개 보병사단과 주축 루마니아군 1개 군단 포함)은 크림반도에 대해 1941년 10월 30일 공격을 개시해 11월 16일까지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함락시켰다.
독일군은 모든 병력을 동원해 12월 17일 새벽에 세바스포톨 점령을 시도하지만, 피만 뿌린 채 방어선을 뚫는 데 실패했다. 이에 만슈타인은 특별 조치를 취했다. 다름 아닌 현대판 '투석기'인 야포를 동원해 세바스토폴 요쇄를 파괴하는 공성전 방식이었다.
독일군은 6개 사단 병력에 1천275문의 포를 동원해 닷새동안 집중포격을 퍼붓고 탈환을 시도했지만, 필사적인 소련 방어군에 의해 좌절됐다. 이 와중에 소련군은 제79 독립 육전대(해병대)연대의 보충과 흑해함대의 병력 수송 등으로 재정비됐다.
그러나 소련군의 행운도 1942년부터는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겨울공세에 맞춰 케르치 반도에 병력을 수송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역습을 당했다. 결국 같은 해 5월 18일 케르치의 소련군은 17만여명의 포로를 남긴 채 저항을 포기했다.
케르치에서의 승전에도 세바스토폴은 여전히 저항을 이어나갔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만슈타인은 같은 해 5월 말 '비장의 카드'를 끌여들여 전세 역전을 꾀했다. 바로 구경 800㎜의 구스타프 열차포였다. 열차포는 사격을 개시한 지 5일 만에 세바스토폴 요새의 탄약고를 박살내는데 성공했다. 구경 600㎜ 박격포 등 1천300여문의 화포 공격에 요새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어 양측 사이에는 6월 말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난공불락처럼 보이던 세바스토폴은 마침내 6월 30일을 시작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날 스탈린은 주요 방어 병력에 해상 철수 명령을 내린 날이기도 하다. 주요 병력은 잠수함과 화물선 등을 통해 철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후방 병력은 전멸했다.
결국 독일군은 7월 3일 세바스토폴을 수중에 넣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은 사망자 4천264명을 포함해 2만7천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소련군의 희생은 1만8천명의 사망자 등 9만5천여명으로 파악됐다.
세바스토폴 전투는 지휘관들에 대한 스탈린의 무자비한 숙청으로 오합지졸이나 마찬가지였던 소련군이 전쟁 초기에 우세한 적을 상대로 희생적인 사투를 벌인 전투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세바스토폴은 군항으로서 휴양지로서 존재해오다가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다시 역사의 전면에 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