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프란치스코는 12일 염수정 추기경을 비롯한 새 추기경 19명을 임명하는 과정에서 하루 전에 통보하던 관행을 깨고 서임 대상자에게 미리 알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관계자는 13일 "서임 사실을 주교회의, 대사관은 물론 본인도 제대로 연락을 받지 못했다"면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발표해 버릴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염 추기경은 저녁 산책을 하다가 뉴스를 본 지인들의 연락을 받고서야 본인의 추기경 서임 사실을 처음 접한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대교구 관계자는 "염 추기경의 처음 반응이 당황, 당혹 그 자체였다"며 "본인이 추기경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관해선 언질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확정적인 것도 아니었고 시점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갑자기 발표가 났다"고 전했다.
이를 두고 천주교 안에서는 '기습 인사'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염 추기경은 12일 밤 서임 소식을 들은 뒤 일부 사제들과 감사기도를 하는 자리에서 "몹시 마음이 무겁고 두렵고 떨린다"는 소감을 밝힌 것도 이런 사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2006년 정진석 추기경이 서임될 때는 전날 교황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아 관련 자료를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갖는 등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염 추기경은 교황청의 갑작스러운 인사 때문에 정식 언론 인터뷰를 비롯해 아직 일정을 전혀 잡지 못했으며, 이미 예정돼 있던 평소 업무를 소화하고 있다.
13일에도 오전에 명동성당에서 열린 추기경 서임 축하행사에 참석하고 나서 오후에는 곧 있을 사제들의 인사이동과 관련해 인사 대상인 신부들을 면담했다.
서울대교구 관계자는 "교황님의 첫 인사를 겪어보니 앞으로도 이러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교황 프란치스코가 개발도상국 사제들을 대거 신임 추기경으로 임명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배 구도 쇄신에 큰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평가했다.
이번에 추기경으로 임명된 19명 중 나이가 80세 미만으로 교황 선출권을 갖는 사제는 16명이다.
이들 중 유럽과 캐나다 출신이 각각 6명과 1명이고 나머지 9명은 남반구와 아시아, 아프리카 출신이다. 오랫동안 추기경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던 필리핀의 사제도 포함됐다.
WSJ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이티 등 비(非)서구권 사제를 대거 기용한 이번 임명은 서구 성직자를 추기경으로 임명했던 전임 교황 베네딕트 16세와 차별성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도 교황이 비(非) 서방권 국가 출신의 사제를 대거 추기경에 임명한 것을 두고 "교황의 시선이 가난한 나라로 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들어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국가들의 가톨릭 교세가 크게 확장했는데도 그간 수세기 동안 교황청내 추기경단은 유럽 국가 출신이 장악해온 `불평등'이 있어왔다고 비판했다.
그런 점에 비춰 프란치스코 교황이 특히 아이티, 부르키나파소, 니카라과, 아이보리코스트 등 가난한 나라의 사제를 추기경단에 포함시킨 것은 획기적인 인사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면서 교황이 이번 추기경 인사를 통해 `가난한 사람과 국가를 돕는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두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명한 가톨릭 역사학자인 알베르토 멜로니도 "(이번 인사는) 교황의 시선이 가난한 남반구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고 평했다.
하지만 WSJ은 교황이 최근 몇년 동안 수차례 추문에 연루됐던 바티칸 행정기구 '큐리아'의 멤버를 승진시킨 점 등을 들어 교황의 인사가 급진적인 개혁이라고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