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월 4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3층 크리스탈볼룸. 평소 한가하던 이곳은 온종일 수많은 인파가 북새통을 이뤘다. 롯데백화점의 '2013년 총결산 패션잡화 브랜드 패밀리세일' 때문이었다. '최대 90%까지 할인'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이 행사에는 80여개 브랜드, 50억원어치의 물량이 투입됐다. 오전 10시30분 시작할 예정이던 이날 행사는 오전 8시부터 고객이 몰려들어 20분이나 앞당겨야 했다. 롯데백화점은 이 행사만으로 12억9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방문객수는 1만명이 조금 안 되는 9500여명이었다.
# 같은 날, 서울 홍대역 근처에 위치한 드러그스토어 올리브영엔 손님들이 북적였다. 올리브영 론칭 14주년 기념으로 진행한 할인행사 때문이다. 올리브영은 12월 4일부터 12월 8일까지 5일 동안 1만여 품목을 대상으로 10~50% 할인을 진행했다. 화장품 브랜드부터 생활용품ㆍ스낵류까지 대대적으로 할인공세를 퍼부었다. 세일 초부터 SNS를 통해 입소문이 퍼지더니 세일 마감이 임박하자 일부 매장에서는 007작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경기도 일산 파주시에 거주하는 주부 이수화씨는 "원하는 마스카라가 올리브영 목동점에선 모두 동이 나는 바람에 하는 수없이 김포공항 롯데몰에 있는 지점까지 찾아가 구매했다"며 "평상시보다 세일품목이 늘어나고 할인율이 커 발품을 팔았다"고 전했다. 올리브영은 지난 10월 세일 때보다 품목수를 1100개 늘린 1만개 제품을 할인 판매했다. 세일 기간 일평균 구매 고객수는 평균 23만명으로 전월 대비 140% 증가했다.
# 12월 13일. 하루 온종일 검색어 1위를 차지한 건 인터넷 쇼핑몰 '11번가'였다. 11번가는 이날 하루 동안 고가의 패딩제품과 명품잡화 등을 저렴하게 파는 행사를 열었다. 이름하여 '11번가만의 블랙프라이데이 행사'. 오후 7시께 사이트에 접속하자 80만원이 훌쩍 넘는 몽클레어 패딩은 완판됐다.
365일 중 101일이 세일
외국브랜드 백팩과 장지갑도 몽땅 팔렸다. 54만9000원부터 판매된 캐나다구스 제품 상당수가 품절을 기록했다. 11번가는 "이 행사를 통해 사상 최대 거래액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이 '세일중'이다. 국내 대표 백화점 3사는 올해 사상 유례없는 최장 기간의 세일을 진행했다. 국내 주요 백화점은 올 1ㆍ4ㆍ7ㆍ10ㆍ11ㆍ12월 6차례에 걸쳐 정기세일을 101일간 진행했다. 이 가운데 신년과 봄 정기세일이 각각 17일씩 열렸고, 여름 정기세일은 31일이나 진행됐다. 가을 정기세일은 19일, 겨울 송년 세일은 17일 동안 열렸다. 백화점 세일기간은 2010년 78일, 2011년 85일이었다. 지난해 역대 최장인 101일로 늘었다.
신세계사이먼 프리미엄 아울렛의 여주ㆍ파주점은 12월 말까지 '이어 엔드 세일(Year End Sale)'을 실시한다. 찰스앤키스ㆍ코치ㆍ마이클 코어스 등 대표 브랜드를 추가 할인된 가격과 균일가에 파는 행사다.
대형 유통채널만 그런 것도 아니다. 주요 번화가에 나가보면 홍콩에서나 볼법한 '클리어런스(재고 처리)' 수준의 할인행사를 펼치는 상점이 수두룩하다. ABC마트ㆍ슈마커ㆍ레스모아 등의 대형 신발 멀티숍들도 경쟁적으로 연말 세일을 진행하고 있다. 굳이 정기세일을 하지 않아도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 내 매장들이 '50%' 이상 할인하는 일을 찾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온라인 업계의 경쟁은 거의 '폭탄할인' 수준이다.
원래도 반값이 콘셉트인 소셜커머스 업체들은 구매액의 50%를 포인트로 돌려주거나 일정 금액 이상을 구매하면 추가 할인을 해준다.
이처럼 온ㆍ오프라인 업체를 막론하고 유통업체에 할인폭탄이 터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세일을 고수하던 명품 브랜드나 고가의 아웃브랜드까지 가세해 할인을 하지 않는 곳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이유는 간단하다. 경기침체가 장기화하고 있어서다. 살림이 팍팍해진 소비자 지갑을 닫고 있으니, 유통채널로선 가격을 내릴 수밖에 없다는 거다. 김미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렇게 말했다. "극심한 경기침체가 2년 연속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기업 입장에서 경기가 안 좋다고 넋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우리나라의 1995~2012년 민간소비 증가율은 연평균 3.8%였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연평균 2% 수준으로 1.8%포인트가량 급락했다. 올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올 1분기엔 마이너스(-0.4%)로 추락하더니 2ㆍ3분기엔 각각 0.7%, 1%에 그쳤다.
알고 보면 싸지 않은 '할인'
오세조 연세대(경영학)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경기침체가 계속되다보니 소비자들은 지갑을 닫을 수밖에 없다. 특히 중산층 이하가 그렇다. 고소득층에 비해 살림살이가 팍팍해졌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중산층 이하가 자주 찾는 소매업체에 타격을 입히고 있다. 소매업체가 가격할인에 나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과도한 할인전략은 제로섬 게임으로 치달을 공산이 크다."
소비자의 불만도 많다. "세일을 너무 자주해 복잡하기만 하다"는 것이 첫째 불만이다. 돈을 더 벌겠다고 진행한 세일이 부메랑처럼 '불편함'만 선물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이를 엿볼 수 있는 사례 한 토막이다.
12월 15일, 경기도 이천 롯데 프리미엄아울렛으로 가는 길. 아울렛까지 2.5㎞ 앞두고 도로가 꽉 막혀있다. 급기야 아울렛에서 1㎞ 떨어진 도로 바깥쪽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는 이들까지 있다. 12월 13일 오픈한 이곳 아울렛에 방문하려는 이들이 한꺼번에 몰렸다. 할인행사가 많은 아웃도어 브랜드 매장 쪽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볐다. 그랜드 오픈 세일을 진행하는 나이키 매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수준. 바로 옆 아디다스 매장도 북적였다. 바로 옆쪽에서 "하나 더 사면 50% 할인이래. 얼른 골라봐"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너무 자주해 세일이 식상하다" "그렇게 싸지도 않더라"는 불만도 쏟아진다. 서울 논현동에 거주하고 있는 황인희(가명)씨는 이렇게 말했다. "12월 4일 진행된 롯데백화점 패밀리 세일에서 특가로 나온 한 잡화 브랜드의 머플러를 2만9000원에 샀다.
가격을 애초에 높게 책정한 뒤 세일을 해 고객을 성나게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최근 백화점에서 '반값''반의 반값'으로 할인판매된 40만~50만원짜리 정장의 원가가 8만~10만원에 불과할 정도다. 한 아웃도어 브랜드 업체는 고가의 브랜드 제품을 론칭한 지 한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세일제품'으로 내놔 원성을 산 일도 있었다.
여준상 동국대(경영학) 교수는 "소비자의 반응을 염두에 두고 처음부터 제품가격을 높게 책정한 뒤 습관적으로 세일을 진행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며 "가격거품을 활용해 소비자들에게 '합리적ㆍ경제적 소비를 할 수 있다'는 동기부여를 하는 식의 마케팅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잦은 할인판매는 기업브랜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소비자의 가격저항을 불러일으켜 수익성을 저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천경희 가톨릭대(소비자주거학) 교수는 "과도한 세일이 기업의 자산과 브랜드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기업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소셜커머스 등 온라인 쇼핑업체의 출혈경쟁은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 오래다. 이들은 반값 할인도 모자라 특정 금액 이상을 구매하면 추가할인을 해주거나 포인트를 돌려주는 식으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하고 있다. 40만원어치 상품을 구매하면 20만원을 포인트로 돌려주는 일도 있었다.
신동희 성균관대(인터랙션사이언스학) 교수는 "실속형 소비자(체리피커)를 잡기 위해 공격적으로 할인을 하면 제살 깎아먹기 경쟁만 가열될 뿐"이라며 "이는 모든 상품의 서비스 질을 떨어뜨릴 공산이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온라인 상거래 비용이 다른 유통채널보다 적게 든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드는 '유통비용'을 무시하고 과도하게 할인된 값에 판매를 하면 오래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비자의 과소비 습관도 문제
온라인 쇼핑몰이나 소셜커머스가 홍보하는 것만큼 가격혜택이 큰지도 의문이다. 한 소비자는 "11번가에서 저렴하게 팔았다고 홍보한 몽클레어 제품은 백화점에서는 팔지 않는 모델이어서 얼마나 저렴하게 산건지 비교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비교대상이 없는 제품을 대폭 할인했다며 소비자를 유혹한 게 아니냐는 거다.
천경희 교수는 "무분별하게 세일한다고 해서 한없이 구입하는 소비자들도 이제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며 소비습관부터 가다듬어야 할 때라고 꼬집었다.
글ㆍ사진 김미선 기자 story@thescoo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