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마다 사연과 기품을 간직한 석조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선 도시 중심부는 미려한 경관이다.
'북부의 베네치아'라는 별칭답게 수많은 운하가 시내를 이리 저리 관통하고 있어 운치가 있다. 단순히 아름다운 데서 그치지 않아 도시 전체가 인류의 문화예술품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적 도시라는 점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매력은 네바 강을 끼고 있는 도시의 번번한 외관과 소중한 유적들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곳의 진정한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 속내를 차분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유럽을 향한 창, 갈림길의 승부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 태생부터가 범상치 않다. 이곳이 러시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고대 루시 시절. 하지만 본격적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표트르 대제 때인 1703년부터였다.
사실 이때는 러시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한 세기 반에 걸쳐 빠른 속도로 획득한 광활한 아시아 영토를 바탕으로 고대 루시의 전통에 안주하느냐, 아니면 기술적.문화적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던 서유럽의 길을 좆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젊은 군주 표트르는 과감히 승부수를 던졌다. 서유럽을 따르는 길을 선택한 것.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늪지대에 불과했던 네바 강변 지역을 도시로 일구기 시작했다.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다.
매서운 북국의 추위, 잦은 범람으로 쉽게 늪이 돼버리는 네바 강 그리고 발트 해의 짙은 습기는 이미 험난한 여정을 예비하고 있었다.
1만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목숨을 앗아갈 정도로 대역사였다. 그 노고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사람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뼈 위에 세운 도시'로 부르기까지 했다.
결국 갖은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표트르는 도시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러시아의 '유럽을 향한 창'이 제 모습을 갖춘 것. 그러자 많은 이들로부터 경탄과 찬사가 이어졌다.
지금도 시내 도처에는 바로크풍의 궁전과 광장, 사원, 성당, 동상 등 당시 쌓아올린 다양한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표트르 대제가 도시 건설을 위해 첫 삽을 들었던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원로원 광장에 우뚝 서 있는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 장엄한 이삭 대성당 등이 옛 제국의 수도로서 중추적인 위치를 점했던 이 도시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 안에 있는 감옥의 첫 죄수가 표트르 대제의 아들 알렉세이였다는 사실. 죄목은 반역죄였다. 차르에 대한 반역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만인에게 보여주고자, 아들을 가두고 끝내 죽였던 것이다.
얼핏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연상되기도 한다. 성당에는 제정 러시아의 역대 차르와 그 황후들이 묻혀 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