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 13일 총리 공관에서 이병기 주일한국대사를 만나 한일 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뜻을 강하게 전달했다. 그 다음 날에는 연 이틀 한국 국회의원들을 만나는 등 신경을 쓴 티를 곳곳에 나타냈다.
하지만 같은 날 일본의 한 보수 주간지가 한국을 '어리석은 국가'라고 비판한 아베 신조 총리의 발언을 인용 보도하면서 아베 총리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보수성향의 일본 산케이신문 구로다 지국장은 CBS와의 통화에서 "아베 측근들 사이에서 비슷한 이야기들은 많이 나온다"고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여기에 17일 주일 한국대사관 이전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피해자들과 관련된 문서들이 대거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일 관계의 뇌관이나 다름없는 역사문제가 다시 전면에 부상하게 됐다. 박근혜 대통령의 진정성 원칙이 더욱 힘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형국인 것이다.
문제는 언제까지 이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느냐다. 냉정한 현실외교의 측면에서, 현재 동북아 정세는 얼마든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시점에 입장 변경을 강요당할 수 있다. 이 때는 명분과 실리를 모두 잃게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현재 정부의 강경한 대일정책을 유지시키고 있는 게 국내 여론이라면, 이를 바꾸기 위해 압력을 키우는 쪽은 미국이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16일 "과거에 발목잡히지 말고 미래로 나갈 필요성이 있다"면서 한일 양국에 공히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나타냈다. 그에 앞서서는 주일 미국 대사를 파견하며 '한일 관계개선'이라는 특명을 내렸다.
미국은 현재의 한일 관계가 대중국 포위망을 위한 한미일 3국 협력 체제 구축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나름의 노력'을 하는 것에 비해 한국이 지나치게 높은 강경한 원칙을 유지하고, 그 결과 3국 협력체제 구축이 늦어진다고 판단되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태도 변화를 본격적으로 압박할 것이다.
여기에 영토 문제 등으로 일본과 각을 세우고 있는 중국이 경제적 이유 등으로 일부라도 중일 관계를 회복하면, 대일 전면 냉각상태인 한국은 그야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다. 아베 총리의 자민당과 연립내각인 일본 공명당에는 중국 지도부와 친분이 있는 친중파가 대거 포진돼 있다. 중일 채널이 한일 채널에 비해 훨씬 활발하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도덕적 원칙만 강조하다가 등 떠밀리듯 '억지' 관계 개선에 나설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환경이다.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통해 미리미리 활로를 모색해 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실무자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목소리가 나오지만, 일단 지금은 박 대통령의 '원칙' 하에서만 움직이는 실정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양국 언론 모두에서 한일 관계 개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게 긍정적"이라며 "정부가 운신할 폭이 조금씩 더 넓어지는 상황에서 실무자들이 정상회담의 여건을 만드는 쪽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