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이 판매하는 농축산물에 대해선 누가, 어디서, 어떤 과정을 거쳐 생산했는지 묻지도 따져보지도 않고 제값을 다 주고 구입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과연 농협을 믿어도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됐다.
최근에는 국내 최대 규모의 쌀 가공시설을 갖춘 전남 해남군의 옥천농협이 묵은쌀을 햅쌀로 속여 팔다 경찰에 적발되기도 했다.
CBS 노컷뉴스는 3회에 걸쳐 농협의 잘못된 유통구조를 진단한다. 첫 번째로, 단위 농협들의 ‘쌀 섞어 팔기’ 실태를 고발한다.
◈ 믿을 수 없는 농협 쌀...섞어 팔고, 속여 팔고
전남 해남군의 옥천농협은 국내 최대인 연간 3만 톤 규모의 쌀을 공급할 수 있는 미곡종합처리장(RPC)를 갖추고 있다.
옥천농협은 일본 품종인 히토메보레 쌀로 ‘한 눈에 반한 쌀’ 브랜드를 만들어 ‘러브米’ 인증을 받는 등 전국적인 명성을 얻어 왔다. 하지만 이 같은 브랜드 가치는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됐다.
전남지방경찰청은 옥천농협이 2009년 1월부터 묵은쌀과 햅쌀을 2대 8 비율로 섞은 뒤 햅쌀로 표시해 전국 대형마트 등에 1만3,400t 시가 178억 원어치의 쌀을 납품해 왔다고 4일 밝혔다.
국내 성인이 이틀 동안, 서울 전체 인구가 일주일간 먹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 농협의 이상한 쌀 유통...비싸게 구입하고 싸게 납품
오대쌀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강원도 철원농협은 올해 오대벼 1kg당 수매가격을 지난해 보다 10원 올려 1,590원씩 수매했다.
이에 반해, 철원농협 인근에 있는 김화농협은 오대벼 1kg당 1,600원에 수매하고 50원의 장려금까지 더 얹어서 1,650원씩 매입했다.
이 같은 벼 수매가는 지난해 1,570원 보다 80원이나 올린 것으로, 철원농협 보다도 60원이나 많은 금액이다.
더구나 벼 1kg은 방아를 찧고 나면 쌀이 600g~700g 밖에 나지 않아, 실제 쌀로 환산했을 경우 수매가격은 80원이 아닌 100원 이상 오른 셈이다.
그런데 김화농협은 어찌된 영문인지 (주)현대 그린푸드에 판매하는 쌀 납품가격은 지난해 보다 1kg당 50원 인상하는데 그쳤다.
살 때는 100원 이상을 더 주고 사고, 팔 때는 50원만 더 받고 판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왜 이런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먼저 수매가를 올린 것은 철원지역에서 생산되는 오대벼의 수량이 한정돼있다 보니 주변 농협 보다 한 푼이라도 더 주고 수매물량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벼를 비싸게 주고 수매했다고 대형 유통업체에 이윤까지 남겨 납품할 경우 거래처가 끊기니 무턱대고 올릴 수 도 없는 을(乙)의 입장인지라 쌀 1kg당 50원 이상 손해를 보고 판매하고 있는 된 것이다.
이렇게 김화농협이 무모한 장사를 할 수 있는 배경에는 믿는 구석이 있기에 가능하다. 바로, 정부가 저금리로 융자 지원하는 수매자금이 있기 때문이다.
◈ RPC 난립...정부 수매자금 따먹기 경쟁
현재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RPC는 농협 152개와 민간 184개 등 모두 236개가 있다.
이들 RPC는 정부를 대신해 농민들로부터 벼를 수매하고 정부로부터 연리 0%~2%의 저금리 융자금을 지원받는다.
정부가 올해 편성한 벼 수매 지원금은 1조2천억 원으로 RPC 한 곳당 평균 508억원에 달한다. 정부는 이들 RPC에 대해 1년에 한 번씩 경영평가를 실시해 지원금리를 결정한다.
이렇다보니 RPC들은 낮은 금리의 수매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벼 수매부터 가공, 판매까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을 벌인다.
김화농협의 경우 우선 당장 손해를 볼지언정, 금리 0% 자금을 쓸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기에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최근 묵은쌀을 햅쌀과 섞어 판매하다 경찰에 적발된 전남 해남군 옥천농협의 경우도
지난해 남부지방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으로 히토메보레와 일미쌀 생산량이 급감한 상황에서 연간 3만톤 이상의 쌀 유통물량을 채우기 위해, 소비자들의 눈을 속이는 섞어 팔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쌀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김기철(가명, 57세) 대표는 “옥천농협의 경우 지난해와 올해 부족한 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경기도 이천과 여주 등지에서 쌀을 대량 구매해 내려간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 쌀 혼합의 기술...유통업계의 공공연한 비밀
현행 양곡관리법은 히토메보레와 오대 등 고품질 쌀이 80% 이상, 나머지 20% 이하는 저품질 쌀이 섞여 있다면 고품질 쌀 브랜드를 사용해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1등급 쌀 90%와 저품질 쌀 10%가 섞인 10kg 한 포대를 3만원에 납품했다면,
고품질 쌀 80%와 저품질 쌀 20%가 섞인 것도 얼마든지 같은 가격인 3만원에 납품할 수
있다.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 따르면, 현재 국내 농협 RPC가 공급하는 유명 브랜드쌀의 경우 순도가 80~90% 정도로 나머지 10~20%는 저품질 쌀이 섞여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농협 RPC 같은 납품업체가 쌀 혼합비율을 임의로 조정하든 대형 할인매장, 백화점 등 유통업체와 협의하든 일반 소비자들은 전혀 알 수가 없다는데 있다.
실제로, 최근 경찰에 적발된 전남 황산농협의 경우 일반 쌀 71톤을 친환경 쌀로 포장해 유통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충남에서 양곡 유통업체를 운영하는 박석진(가명, 45세) 대표는 “쌀은 좋은 품종과 일반 품종을 얼마든지 섞거나 속여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농협이 가격 조정을 하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훨씬 쉽다”고 전했다.
한편, (주)이마트에 쌀을 납품하고 있는 강원도 철원농협은 올해 벼 1kg당 수매가를 지난해 보다 10원 올리고, 쌀 납품가격은 30원 인상했다.
하지만, 납품가격을 올려 준 이마트는 원가가 올랐음에도 철원 오대쌀 10kg 한 포대 소비자 가격을 지난해와 같은 3만3,800원에 판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