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 12.5m, 폭 3m, 깊이 30~50cm의 구덩이 아래 쪼개지고 바스러진 뼛조각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63년 만에 햇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양손을 뒤로 한 채 무릎을 꿇고 구덩이 양쪽 벽을 바라보는 뼈의 위치. 발굴된 유해에는 '그날'의 마지막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구덩이 주변에는 M1·카빈 소총의 탄피와 탄두, 탄창 50여 점이 곳곳에 널려있었다.
발굴 책임을 맡은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는 "사람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양쪽에서 총을 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탄피는 유해 사이사이에서도 더러 발견됐다. "구덩이 밖에서만 총을 쏜 것이 아니라 일일이 살펴보며 '확인사살'을 했다는 정황"이라는 설명이다. M1·카빈 소총은 당시 군과 경찰이 사용하던 총기다.
일부 유해에 남아있는 어금니의 발치상태는 이들이 17세에서 22세 사이의 남성이었음을 보여줬다. 단추 28점과 안경 1점도 함께 발견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9일 공주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 등 400여 명이 이곳으로 끌려와 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으로 희생됐다.
이 가운데 317구의 유해는 지난 2009년 발굴됐지만 '예산 부족'으로 나머지 유해는 발견하고도 수습하지 못했다. 4년 넘게 방치되면서 죽음 이후에도 기구한 사연을 이어가야 했던 것.
최근 충남도는 유해 수습을 위한 예산을 확보해 공주시에 지원, 뒤늦은 발굴이 이뤄질 수 있었다.
현장에 참석한 곽정근(80) 유족회장은 "2009년에 유해 발굴이 중단되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는데 이제라도 제대로 모실 수 있게 돼 다행"이라면서도 "가족이 손을 묶인 채 이 산길을 걸어 올라왔을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이곳에서 친형(당시 22세)을 잃었다.
유해 발굴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남은 과제들이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은 "희생자 가운데 여성도 2명이 있다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발굴된 유해 가운데 여성은 없다. "트럭 17대가 30~40명씩을 싣고 왔다"는 증언 역시 추가 희생자 가능성을 제기한다.
유해 발굴지의 활용 방안 역시 만만치 않은 문제다. 유족들은 "아픈 역사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위령공원으로 만들어 달라"고 말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역시 지난 2010년 공주 집단학살을 '명백한 불법행위'로 규정하며 국가와 지자체에 희생자 위령사업 지원 등을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발굴지가 개인 사유지인데다, 예산이 없어 유골 발굴마저 뒤늦게 이뤄진 점을 볼 때 향후 계획은 막막한 상태다. 공주시에서도 현재 구체적인 대책은 없다.
63년 만에 드러난 희생자들의 아픔이 '끝'이 아닌 '진행 중'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