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전셋값보다 저렴하게 큰 평수의 새 아파트에 2년간 살다가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돈을 돌려받고 나가면 된다는 말을 믿고 덜컥 계약부터 했다. 하지만 나갈 때 돌려받는 보증금에서 건설사가 대신 내주고 있는 중도금 이자의 일부를 빼고 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더욱이 무늬만 전세 아파트지 실제로는 은행에서 대출받은 중도금도 결국은 집주인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김씨는 "전세대란으로 고통 받고 있는 무주택 서민들의 허점을 이용하는 일부 업체의 이런 속임수에 치가 떨린다"며 가슴을 쳤다.
주택시장 침체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미분양 아파트에 대해 다양한 혜택 보장을 약속하는 건설사들의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피해를 입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2년만 살아보는 집'의 배신에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이런 전세형 분양은 '애프터 리빙', '프리 리빙', '스마트 리빙' '분양 조건부 전세', '매매보장제' 등 그 이름도 다양하다. 하지만 일부 조건만 다를 뿐 입주자가 분양가의 일정금액(20~30%)을 지불하고, 일정기간(2~3년) 먼저 살아본 뒤 마음에 들면 정식으로 분양계약을 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치솟는 전셋값으로 집 구하기가 별따기인 상황에서 관리비·이사비·교육비를 지원하고 취등록세 환급 등의 보너스까지 안겨준다는 말에 소비자들은 분명 혹할 수 밖에 없다. 싼값에 거주할 수 있고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건실한 건설사에서 보증금을 돌려준다고 하니 "설마 떼 먹겠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소비자들은 이 파격적인 혜택과 시공사인 건설사의 간판을 믿고 계약을 체결하지만 실제 계약당사자는 시공사가 아닌 시행사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들 시행업체는 재무상태나 신용도가 높지 않다. 2년이 지나서 입주자가 분양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 자금력이 부족한 업체들은 계약자가 낸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또 이들 전세형태의 분양은 전세제도처럼 이름을 붙여놓고 전세인 양 광고하지만 막상 계약서를 꼼꼼하게 살펴보면 '매매 계약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들어 보증금액이 분양가의 20%였다면 나머지 80%는 입주자 명의의 대출로 설정된다. 이렇게 되면 본인 명의의 아파트를 매매했으므로 중도금 이자·취등록세·재산세 등이 발생하게 된다. 일정기간이 지나서 아파트를 구입하지 않으면 건설사가 대신 납부한 이자를 제외한 금액만 중도금으로 돌려받을 수 있기 때문에 결국 아파트를 구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현재 전세형 분양을 도입한 아파트는 전국적으로 25개 단지에 3만 2500여 채 정도다. 이중 부산 2곳을 제외하고 나머지 23개단지는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고양·용인·김포·파주에 무려 12개 단지가 몰려있다.
박원갑 국민은행 부동산 전문위원은 "2~3년 지나면 시장 여건이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과 입주자들이 아파트에 들어가 살게 되면 정을 붙이고 애착을 갖게 돼 결국 분양을 받을 것이라는 건설사들의 계산이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계약 체결시 세부적인 계약조건들을 자세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은진 부동산 114 리서치 팀장은 "계약서 상에 매매시점이 표기돼 있지 않다면 주택이 팔리지 않는 경우 계약자들이 실납입 금액을 돌려받기 힘들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부분이 명확히 쓰여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일정 기간 살아본 뒤 분양을 포기하는 경우 계약자들에 어떤 책임이 전가되는 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박 위원 역시 "이러한 전세형 분양제도를 진행하는 주체들의 대부분이 소규모 시행사"라며 "향후 이들의 부족한 자금력으로 문제가 발생하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계약자들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계약 시 이를 체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전세형 분양제와 관련된 정부 지침이 없다 보니 대부분의 업체들이 애매한 조항들과 파격적인 문구로 현혹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건설사들은 계약 체결 시 환매 방법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기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을 의무화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