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세에 휘둘린 3일천하-창덕궁 관물헌

고궁 전각에 얽힌 재미있는 뒷 얘기 시리즈⑬

'3일 천하'로 막을 내린 갑신정변의 마지막 무대가 된 창덕궁 관물헌의 가을 정경(자료제공=문화재청)
▲갑신정변의 마지막 무대 관물헌(觀物軒)

1884년 10월 19일. 창덕궁과 창경궁 일대에 수상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물샐 틈조차 없이 궁궐을 둘러싼 군사들은 다름 아닌 청나라 군사들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창덕궁을 둘러싼 군사는 무려 천5백을 넘게 헤아렸다. 이들은 순식간에 돈화문과 선인문을 거쳐 궁 안으로 난입했다. 천여명의 조선군들이 방어에 나섰지만, 1차방어선은 쉽게 허물어졌다.


2차방어선을 구축했던 일본군은 싸움 한번 변변히 하지 않은 채 도망치기 바빴고, 남은 것은 개화당의 50명의 병사와 몇 안되는 사관생도로 구성된 내위뿐이었다.

관물헌에서 고종을 사실상 감금하고 있던 김옥균과 서광범, 박영효, 그리고 홍영식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중과부적.

개화파 김옥균의 모습.
김옥균등 몇몇은 겨우 몸을 빼냈지만, 홍영식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급진개혁파들이 시도했던 자주적인 근대국가 건립의 희망은 어이없게도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갑신정변의 주체들과 일부분 이해를 같이했던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은 갑신정변의 실패 이유를 6가지로 꼽았다.

첫째, 군주를 위협한 점. 둘째, 외세를 믿고 의지한 점. 셋째, 민심이 따르지 않은 점. 넷째, 청국의 군사력을 과소 평가한 점. 다섯째 왕과 왕비의 의향을 어긴 점. 여섯째, 당붕(黨朋)의 도움 없이 일을 다급하게 처리한 점.

모두 일리 있는 지적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선수 서재필(?)

갑신정변 주역중 한사람인 서재필. 미국에 정착해 미국인 신분으로 살았다.
갑신정변에 참여했던 인물 가운데 정변이후 가장 독특한 인생행보를 걸어간 사람은 독립신문으로 유명한 서재필이다.

독립협회를 만들고 신문을 창간하는등 다소 이지적이고 정적인 인물로 보기 쉽지만, 사실 서재필은 갑신정변 당시 고위대신을 살해하는 임무를 맡은 행동대장이었다.

서재필은 19살이었던 1882년 별시 문과에 합격했지만, 무관으로 변신해 일본의 육군학교를 나온 전형적인 강골이자 무관이다.

서재필은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으로 몸을 피한 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의학공부를 하고, 미국내에서도 상류층이라 할 수 있는 의사가 된 인물이다.

이름도 필립 제이슨으로 바꾸고, 미국인 여성과 결혼해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했다. 이른바 갑오개혁으로 새로운 인물이 필요해진 정권의 요청으로 1894년 귀국했지만, 조선사람이 아닌 미국인 신분으로 돌아와 중추원 고문관으로 일했다.

그러나 귀국 후 얼마되지 않아 정권과의 외교노선 마찰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서재필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진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은 1905년 미국선교사가 창단한 YMCA야구단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이자 최강의 야구단이었던 YMCA야구단의 이야기는 2002년 같은 이름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보다 10년 가까이 앞선 1896년 이미 우리나라에서 야구경기가 벌어졌다는 기록이 발견됐다. 서재필이 발간한 <독립신문> 4월 28일자 영자판에는 ‘1896년 4월 25일. 서대문밖 모화관에서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들간의 야구경기가 있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있다.

2002년 개봉한 영화 YMCA야구단.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단으로 알려져있지만, 이보다 10년 앞서 서재필이 야구선수로 활약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홈페이지 캡쳐)
그리고 미국인팀의 선수명단에는 Philip Jaison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데, 다름 아닌 서재필이다. 기록상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선수였던 셈이다.

▲외세의 힘을 빌어 실패한 한국판 신해혁명

갑신정변은 중세국가체제를 청산하고,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한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한 사건이다. 하지만 치밀하지 못한 준비와 외세를 등에 업고 시작한 혁명이라는 한계 때문에 불과 사흘 만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부에서는 조선근대화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 사건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내세운 혁신정강의 조항은 당시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정부와 사회구조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지럽던 구한말 가장 크고 원대했던 개화파의 이상은 창덕궁의 가장 작은 정자였던 관물헌에서 막을 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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