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은 해방을 맞았지만 우리는 해방되지 않았어요. 우리는 아직도 전쟁 중입니다." (독일 베를린공대 증언회)
"강제로 끌려갔는데 돈 받고 갔다고 한다. 그럼 내가 돈이라도 많이 벌었어야 하는데 나를 보라." (일본 교토공대 증언회)
지난 7월 10일 미국에서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옥선(86) 할머니의 '증언 대장정'이 독일을 거쳐 9월 29일 일본에서 마무리됐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석 달간 한국에서 3개국 12개 도시를 오가는 강행군이었다.
항공기를 이용한 이동거리만 지구 한 바퀴(4만120㎞)를 웃도는 4만9천877㎞.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한 도시 간 이동거리를 합치면 5만㎞를 훌쩍 넘는다.
미국에서는 동서를 횡단했고 일본에서는 6일 간격으로 홋카이도와 도쿄를 오갔다.
더구나 현지에서 휠체어를 타고 이동할 정도로 거동이 불편한데도 일반석 항공편을 마다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건강상태를 보면 사실상 이번이 마지막 해외 증언 활동이었다.
부산 출신의 이 할머니는 15살 때 중국으로 끌려가 위안소에서 고초를 겪다가 2000년 6월 58년 만에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부모는 돌아가신 뒤였고 자신도 사망신고된 상태였다.
귀국 직후 인공관절 수술을 받았으나 퇴행성 관절염과 골다공증이 심해 최근에는 보행보조기와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다. 위안소 생활 당시 폭행 후유증과 고령으로 청각 장애가 생겼고 치아도 빠져 틀니를 끼웠다.
이런 상태에서도 무리한 일정을 감내한 배경은 절박함이었다.
30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만난 이 할머니의 표정에는 여독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이 할머니는 "힘들어도 내 생전에 반드시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배상을 받을 생각으로 다녔다"며 평소의 결연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이 할머니의 해외 증언 활동은 올해로 12년째다.
2002년 미국 브라운대 강연을 시작으로 4개 국어 명함을 가지고 '인권 외교관'을 자처하며 10여 차례 외국을 방문했다.
독일을 방문한 지난 4일 독일 주간지 슈피겔은 "전 세계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며 일본군의 위안부 만행을 고발하는 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방문기간 내내 침묵했다고 한다.
미국과 일본 방문에 동행한 안신권 나눔의 집 소장은 "한 줄도 보도하지 않는 일본 언론의 외면에 아쉬움이 많지만 신일본여성회 등 일본 시민단체가 주관한 증언회마다 200여명이 찾았고 감동 어린 참관 소감문과 철저한 증언 기록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명예회복 의지를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우리 정부의 역할에 아쉬움도 보였다.
"이제 남은 시간이 없다. (내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누가 나서 내 인권과 명예를 회복시켜 주겠나. 하지만 내가 죽는다고 끝나서는 안 된다. 언젠가는 해결해야 한다."
'정부가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과 관련한 분쟁을 해결하려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 위안부 피해자들이 기본권을 침해당했다'며 제기한 한일청구권협정 제3조 부작위(不作爲·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음)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사건에서 2011년 8월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린 이후에도 한일 정부의 협상은 답보상태다.
국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7명 중 생존자는 56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 가운데 10명이 나눔의 집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