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즈막한 가슴으로 이방인을 품어주는 횡성의 하늘이 참 푸근하다. 차도 인도 할 것 없이 곳곳마다 분홍빛 얼굴을 내민 코스모스도 정겹다. 왠지 일면식도 없었던 먼 친척언니의 집에 방문했을 때 느껴진 낯설지만 묘한 동질감이 풍긴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멋스러움이 담긴 횡성의 가을로 깊숙이 들어가 보자.
■태백산맥의 정기 고스란히, 태기산
횡성에는 산들이 많지만 태백산맥의 장쾌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으뜸은 태기산이다. 해발이 무려 1261m, 횡성군에서 가장 높다. 본래 덕고산(德高山)이라 불렸으나 삼한시대 진한의 마지막 왕인 태기왕이 산성을 쌓고 신라에 대항했다고 해서 태기산(泰岐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양두구미재에서 군부대가 위치한 태기산 정상까지 약 4km. 포장과 비포장이 교차하는 임도 주변에는 높이 80m 풍력발전기가 돌아간다. 모두 20기의 풍력발전기는 멀리서 보면 바람개비처럼 앙증맞지만 아래에 서면 40m길이의 날개가 주는 공포가 서늘하다. 태기산 정상에서 구름사이로 솟아올라 돌아가는 발전기를 보고 있으니 태기왕의 망국의 한이 바람으로 휘몰아치는 듯 처연하기까지 하다.
■온몸으로 맞는 가을, 횡성호수길
강렬한 여름의 뒤안길에 산들바람을 맞으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싶은 분들에겐 횡성호를 추천한다. 횡성호는 남한강 제1지류인 섬강의 물줄기가 횡성댐에 막혀 생긴 호수다. 중앙고속도로 횡성IC를 나와 횡성읍을 지나 19번 국도를 타고 갑천면 방향으로 직진, 구방리 삼거리에서 좌회전 하면 횡성호의 입구 망향의 동산이 나온다.
망향의 동산은 댐이 들어서면서 물에 잠긴 갑천면 구방리, 중금리, 화천리, 부동리, 포동리 수몰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 야트막한 동산에는 옛흔적을 볼수 있는 전시관과 중금리 탑둔지에 있던 삼층석탑, 망향탑이 자리를 지킨다.
망향의 동산을 뒤로하고 호수길로 들어선다. 잔잔한 물결에 투영된 산등성을 바라보며 황톳길을 걷은 유유자적함이 새삼 분주했던 어제일을 잊게 만든다. 웬만한 자동차가 지나갈수 있을 만한 길이 둘러있어 가족, 연인과 함께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코스모스를 비롯해 조촐한 야생화들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어 지루함을 날린다. 평탄한 지형이라 숨이 차진 않지만 맑고 시원한 바람이 아까워 일부러라도 깊은 숨을 쉬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호수를 따라 이어지던 임도는 고개위 작은 빈터에서 끊긴다. 여기서 왼쪽은 휴양림, 오른쪽은 산길이다. 휴양림으로 들어서는 길 초입은 잣나무가 터널을 이뤄 운치있다. 이 가지 저 가지 잣을 찾아 분주하게 달리는 청설모도 눈에 띈다. 호수길이 익숙해 질 때쯤 피톤치드 가득한 침엽수가 깔린 폭신한 휴양림은 덤으로 챙겨도 좋다.
■심신 달래는 자작나무숲, 강원참숯
여기까지 와서 호수길만 취하기엔 발품이 아깝다. 횡성의 가을은 자작나무에 둘러싸인 미술관 '자작나무숲'에서도 만끽할 수 있다. 우천면 두곡리에 자리한 미술관 자작나무숲은 사진작가 원종호 관장이 20여 년 전에 조성한 전원형 미술관이다.
횡성여행은 '강원참숯'에서 마무리된다. 횡성읍 반곡리에 자리한 강원참숯은 옛 전통방식 그대로 참숯을 굽는 숯가마찜질의 원조다. 숯가마는 숯을 빼고 하루정도 열을 식혀야 재작업이 가능한데 이때 가마안의 남은 열기를 재활용하는 것이 숯가마찜질.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피부가 꽃처럼 빨갛게 익어서 꽃탕이라 부르는 숯가마찜질은 숯을 꺼낸지 얼마 안 돼 음이온과 원적외선이 가장 많다고 한다.
워낙 온도가 높아 가마니나 수건으로 몸을 감싸고 들어가도 5분을 버티기 힘들다. 열기를 뿜어내는 가마안에서 땀을 흘리고 있으면 다가오는 혹한기를 버틸 체력이 비축되는 기분이다. 여독이 풀리면서 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