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자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의의와 추진 방향, 추진 과제로 큰 주제가 나뉘어 구성됐다. 신뢰 형성이 남북관계를 발전시키고 통일기반을 구축하며 한반도 평화를 정착하는 데 핵심 요소라는 게 요지다.
문제는 박 대통령이 대선 기간 공약을 통해 밝힌 내용에서 진전된 내용은 찾기 어렵고, 특히 신뢰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와 관련된 '방법론' 부분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북한이 평화를 깨는 잘못된 행위를 한다면 반드시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르도록 함으로써 협력의 길로 나오도록 하겠다"고 신뢰 형성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게 가장 방법론에 가까운 얘긴데, 이마저도 게임이론인 팃포탯 전략(tit for tat, 맞받아치기) 수준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남북 관계가 롤러코스터를 타며 출렁인 데 따른 '정책의 진화'를 이날 책자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데에는 류 장관의 모호한 발언이 또 한 몫 했다. 류 장관은 대부분 질문에 "지금으로써 방향을 말할 수 있는게 없다", "정책이라는 게 살아있는 생물체라 원칙 갖고 대답하지만, 기계적으로 하는게 아니다", "구체적으로 적시하지는 않겠다"는 식의 원론적인 대답을 했다.
또 '프로세스'라는 단계적 의미를 담은 단어를 정책 제목으로 사용하면서도,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3단계 로드맵에 대해 "남북 관계에서 어떤 단계를 도식화해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명확해 보일지 모르지만, 현실에 부합해서 나타나기는 어렵다"고 그나마 구체적이었던 부분마저 다시 추상적으로 만들었다. 앞서 외교부 등 관계 부처에서는 3단계 로드맵을 한반도 비핵화의 단계적 실행방안으로 인식해 왔던 만큼 부처 간 논란까지 예상된다.
'내용이 있다'고 평가된 류 장관의 발언 일부는 이후 통일부 당국자가 "원론적 얘기에 불과하다"며 해석을 제한하면서 하나마나한 얘기 중 하나가 됐다. 류 장관은 금강산 관광 재개 조건과 관련해 개성공단 재발방지에 대한 최근 남북 합의 수준을 적용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에 "중요한 준거틀이 된다"고 했지만, 이후 통일부 당국자는 "(개성공단 합의문에 적시된) 남북 공동 책임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발언을 톤다운 시켰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취재진 사이에서는 류 장관이 이날 기자간담회를 통해 전하려던 메시지가 정확히 무엇이냐는 질문까지 나왔다. 일부러 정책을 더 모호하게 하려는 게 아니었냐는 우스개소리도 있었다.
통일부는 기자들에게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홍보 책자를 나눠준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아의 평화와 발전 추구를 통한 북한 문제 해결’ 문구를 ‘동북아의 평화와 발전 추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북한문제 해결에 기여’로 고친다고 알리는 해프닝도 벌였다. 문구에 ‘궁극적’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해결한다'를 '기여한다'로 고치면서, 향후 목표 달성 평가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시도로 읽힐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