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메르켈 총리가 방문한 '다하우 강제수용소'는?

독일 뮌헨 다하우 수용소(출처=유튜브)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나치 독일의 강제 수용소로서 독일에 최초로 개설된 곳이다.

이 수용소는 남부 독일의 뮌헨 북서쪽 약 16킬로미터 떨어진 다하우라는 중세풍 마을 근처에 버려진 군수품 공장의 대지에 세워졌다.

1933년 6월에 개설된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우파 정당들인 가톨릭 중앙당과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 간에 연립 정권(1933년 7월 6일에 해산되었다)에 의해 최초로 세워진 정식 수용소였다.

뮌헨 지역 경찰청장 하인리히 힘러는 공식적으로 수용소를 "정치범 수용을 위한 최초의 강제 수용소"라고 설명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뒤이은 다른 강제 수용소들의 원형이 되었다.

이 곳에는 30개국 이상 20만 명의 죄수들이 다하우에 수감되었다. 그중 1/3 이상은 유대인이었다.


질병, 영양실조, 자살 등의 이유로 2만 5,613명, 보조수용소에서도 거의 1만 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더 큰 수용소인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함께,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나치 강제 수용소의 상징이 되었다.

이 곳은 영국과 미국 군대에 의해 2번째로 해방되어 서방 세계가 나치즘의 잔인성을 뉴스영화나 언론인의 직접 취재를 통한 보도로 알게 된 최초 장소들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대중들에게 중요한 장소로 자리잡고 있다.

다하우 강제 수용소는 기독교 계통의 종교 성직자들이 반나치 혐의를 받아 많이 수감되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 기록에 따르면, 적어도 3,000여명의 수도사, 부제, 목사, 주교 등이 수감되었다.

종전이 임박한 1945년 4월, 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여건은 점점 악화되었다.

연합군이 독일로 진격해오면서 독일인들은 전선 근처의 강제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더 후방의 수용소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독일은 엄청난 수의 수감자들이 해방되는 사태를 막고자 했다.

소각된 수용소에서 다하우로 수감자들이 계속 도착했다.

이송 며칠 후에 음식이나 물이 거의 없거나 부족했으며, 수용자들은 약해지고 피폐해져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렸다.

1944년말부터 시작되어 해방되던 날까지 1만 5,000여 명이 죽었으며, 그 중 약 절반은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였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다하우 강제 수용소 점령과 관련하여 "우리 군은 악명놓은 다하우 강제 수용소를 해방시켰다. 약 3만 2,000여명의 수감자들이 해방되었으며, 300명 가량의 SS 수용소 경비병들이 무장해제되었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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