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공화국②]장기별거는 곧 ''황혼이혼''…매년 별거 6만쌍

대한민국은 ''별거 공화국''이다. 부부 10쌍 가운데 한 쌍이 따로 산다. 매년 별거를 시작하는 부부만도 6만 쌍이다. 아이들도 아프다. 사실상 한부모 가정인데 법적 지원은 없다. 장기화된 별거는 ''황혼 이혼''도 불러온다. CBS는 현대판 ''부부별곡''(夫婦別曲)의 실태와 대안을 3회에 걸쳐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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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집 살림에 가부장적 폭언…갑자기 전화와 "돈 부쳐달라"

60대 후반의 김복순(가명) 할머니. 올해초 가정법률상담소 문을 두드렸다. "이혼을 하려고 한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20년 전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의 외도. 남편을 나무랐지만 그는 오히려 당당했다. "여생을 사랑하며 살겠다"던 남편은 아예 살림까지 따로 차렸다.

남편의 당당한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이혼을 해버릴까" 수도 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자녀들이 눈에 밟혔다. 자녀들 결혼할 때 누를 끼칠까봐 이혼은 포기했다.

어느새 성장한 자녀들은 대학도 졸업하고 취업도 했다. 그렇게 남편과 떨어져 산 지 15년쯤 되던 어느 날이었다.

아들 녀석이 화가 잔뜩 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연락도 없던 아빠가 갑자기 전화와서는 돈 좀 부쳐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며칠 뒤엔 딸한테까지 전화해 폭언을 퍼부었다. 알고 보니 은퇴 이후 퇴직금도 날리고 빚까지 져 신용불량자가 된 상태였다.

자식들에겐 일단 무시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돈을 안 보내주면 부양료 청구소송을 하겠다"며 협박 전화까지 했다.

별거하던 그 순간부터 ''원래 없던 사람''으로 취급하려 애썼다. 20년동안 참아온 김 씨였다. 하지만 애써 억눌러온 실망과 분노가 폭발하면서, 결국 그녀는 늘그막에 이혼을 요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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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늦게 사회생활 시작한 아내 "내 삶 찾겠다" 이혼 요구

박영철(61·가명) 씨는 지난해 겨울 "이혼해달라"는 통보를 받은 경우다.

큰 애가 대학에 들어가고 작은 애도 중학교에 들어가자, 아내는 공부를 시작했다. 몇 년을 씨름하더니 어느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내밀었다.


대견한 마음에 부동산 사무실을 차려줬다. 그게 화근이었다. 늘 남편 내조와 자식 뒷바라지만 하던 아내는 사회 생활에 이내 재미를 느꼈다. 가정보다 일이 앞서게 됐다.

아내는 동호회 활동까지 시작했다. 자연스레 가정에는 점점 소홀해졌다. "일이 많다"는 핑계로 사무실에서 밤을 새는 날도 많아졌다.

10년 전쯤부터는 점점 집에 들어오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5년 전부터는 거의 발길을 끊었다. 명절 때나 집안 행사가 있을 때만 간혹 얼굴을 내밀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뜬금없이 날아든 이혼 통보. 아내는 떨어져 지낸 몇 년 동안 혼자서 이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혼에 필요한 준비 서류도 이미 다 갖춘 상태였다.

그렇게 연락도 안 하던 아내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박 씨를 찾아와 "이혼해달라"고 통사정했다. "내 삶을 살고 싶다"며 울부짖었다.

점 하나만 찍으면 남이라 했던가. 세상에서 가장 가깝던 두 사람은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먼 사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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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등 쌓이고 대화 끊겨 ''별거 장기화''…결국 ''황혼 이혼''行

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김 씨나 박 씨처럼 황혼 이혼으로 치닫는 경우도 급격히 늘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2년 전국 혼인·이혼통계''에 따르면, 혼인 지속기간 20년 이상인 부부의 이혼 건수 비율이 전체 이혼의 26.4%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눈에 띄는 건 결혼한 지 30년 이상 된 부부의 이혼이 급격히 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부부들의 이혼 건수는 8600건으로 10년전에 비하면 2.4배, 일년전보다는 8.8%나 증가했다.

반면 결혼 이후 4년 안에 이혼한 비율은 24.7%로, 전년에 비해 8.1% 감소했다.

수십 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가 늘그막에 이혼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부부간 대화 단절''과 ''누적된 갈등''을 주요 배경으로 꼽고 있다.

주목할 건 장기 별거도 여기에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가 이혼 상담 사유를 분석해보니, 장기 별거에 관한 상담은 여성 10.5%(202건), 남성 14.3%(66건)였다. 일년전만 해도 여성은 8.5%(155건), 남성은 8.6%(40건) 수준이었다.

장기 별거중인 부부들은 하나 같이 "그래도 가정에 애착을 갖고 배우자나 자녀들과 교감을 찾고 싶었다"고 호소했다는 게 상담소측 설명이다.

하지만 결국 쌓인 갈등을 해결하지 못해 정서적, 잠재적으로 이혼 상태에 놓여있었다는 얘기다.

한쪽의 일방적 가출 등으로 수년간 별거가 진행되지만, 자녀 문제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이혼을 결단하긴 쉽지 않다.

재산이나 생활비 같은 경제적 난관에 봉착하고 나서야 이혼 서류 도장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결혼에 대한 가치관과 사회 풍조의 변화 역시 황혼이혼 증가의 원인으로 꼽힌다.

성문가족법률사무소 송인백 변호사는 "여성의 경제활동이 증가하면서 가정내 부부간의 지위가 동등해졌다"며 "옛날 같으면 참고 살았지만 요즘엔 과감하게 결심하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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