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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에서 수천만의 유권자들은 각자 저마다의 기준에 따라 투표를 하지만 그 속에는 시대의 정신이 담겨 있다.
이번 선거는 사상 처음으로 보수와 진보의 단일후보가 1대1의 정면 승부를 벌였다. 일반적으로 한 사회를 보수와 진보로 양분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보수는 이른바 산업화 세력, 진보는 민주화 세력이 구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발전을 이유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희생한데 대한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 신생독립국 가운데 유일하게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점이 우리 현대사의 긍정적인 모습이라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이념적 갈등과 대립은 어두운 면이라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번 대선은 산업화와 민주화 세력을 대표하는 두 상징적 인물들의 대결이었다.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는 우리나라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고,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상속자라 할 수 있다.
이런 상징성만큼이나 이번 대선에서는 보수, 진보 양 진영의 전례 없는 대결집이 이뤄졌다. 이념적으로 양분돼 대립하고 있는 우리사회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 결과 이번 대선은 마치 한국 현대사에 대한 국민의 선택을 묻는 모양새가 됐다.
[YouTube 영상보기] [무료 구독하기] [nocutV 바로가기] [Podcast 다운로드]그런데 이 문제에 임하는 두 진영의 선거 전략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고,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있다.
박 후보는 선거 운동 처음부터 통합을 표방하며 반대편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행보를 보였다. 후보로 확정된 후 정치적 대척점에 있는 이희호, 권양숙 두 전직 대통령의 부인을 방문했다. 전태일 재단도 방문하려 했지만 유족들의 저지로 무산됐다. 전태일 열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노동자의 근로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분신한 인물로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선구자이고 박정희 정권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당시 홍일표 새누리당 대변인은 "재단 방문은 전태일 열사의 뜻을 기리고 앞으로 국정에 그분의 유지가 반영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고, 보수와 진보로 분열된 현재의 우리사회를 통합해 100% 대한민국을 구현하려는 국민통합에 대한 소신과 각오가 깃들여져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박 후보의 행보에 대해 민주당은 진정성이 결여된 선거 이벤트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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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문 후보는 후보 확정 직후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았지만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지는 참배하지 않았다. 문 후보는 "진정한 반성이 있어야만 통합"이 가능하다면서 "그렇게 된다면(반성을 한다면) 제가 제일 먼저 박정희 대통령 묘역을 찾고 참배하겠다"고 말했다. 상대의 반성이 선행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번 선거에서 두 후보 못지않게 큰 영향력을 행사한 안철수 전 후보도 ''''국민 통합 정치''''를 제일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다. 정치적 이력이 없는 안철수 후보가 양자 대결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은 것도 새정치를 바라는 유권자들의 여망과 함께 그의 부드럽고 통합적인 이미지가 먹혀들었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선거가 진행되고, 특히 안 전 후보와 단일화되면서 문 후보도 국민통합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유권자들에게 각인된 그의 이미지를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박근혜, 문재인 두 후보와 안철수 전 후보가 모두 통합을 내세울 수밖에 없고, 통합이 선거의 주요 화두가 되었다는 것은 이 시대의 정신이 곧 통합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이번 대선결과는 이념적으로 극명하게 나눠진 상황에서 보수표의 결집이 더 강했고, 여기에 중도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이 승부를 갈랐다. 유권자들은 안정을 선택했고, 특히 보수는 문 후보의 집권을 반드시 저지하겠다는 무서운 결집력을 보였다.
이는 내편 네편으로 나누어 대립하고 갈등하기보다는 통합과 상생, 그리고 안정을 바라는 유권자의 표심, 즉 이 시대의 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패배한 민주당은 선거 결과에 대해 더 이상 세대별 투표율 등의 외부 변수를 탓할 것이 아니라 유권자들이 무엇을 원하고,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 냉정하게 반성하고, 스스로 변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됐다. 특히 보수층이 문 후보에 왜 이처럼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지 겸허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승리한 박 후보는 통합의 정치가 단지 선거 구호가 아니었음을 실천으로 보여야 한다. 무엇보다 상대를 인정하고 귀 기울여야 하며, 진보.보수와 지역을 가리지 않는 대탕평 인사로 국민통합을 이뤄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국민 기대가 5년 후 혐오의 화살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고, 이는 어쩔 수 없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혹독한 평가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