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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의 언론, 전선줄 위의 참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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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상욱의 기자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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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5.18 광주 민주화 항쟁과 관련된 언론의 초기 보도는 그저 ''침묵''뿐이었다. 군부는 1980년 5월 18일부터 광주에서 벌어진 일에 대하여는 일체의 보도를 통제하였다. 광주의 지방 일간지들은 20일부터 휴간에 들어갔다.

정부가 광주 항쟁에 대해 처음 언급한 것은 5월 20일 오전 10시 발표이고, 계엄사령부 발표는 20일 오후였다. 그러나 이 발표들은 광주 지역에만 해당되었고 중앙 언론들은 받아 보지 못했다. 20일 저녁 7시 광주 지방 텔레비전 뉴스에만 보도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광주의 이름은 ''.....'' 이었다.

"18일, 19일 학생 등의 소요로 경미한 피해가 있었고 연행한 176명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

18일, 19일 공수부대의 무차별 유혈진압과 학살을 경험한 광주시민들은 이 보도를 접하고 분노했고 KBS와 MBC로 몰려가 항의했던 것.

최초로 언론을 통해 전국에 알려진 내용은 21일 오전 계엄사 발표이다. 오전 10시 30분에 발표돼 방송과 그날 저녁 신문, 다음날 아침 신문에 발표된 내용은 "민간인 1명, 군경 5명이 사망했고 당국은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이런 사태가 빚어진 것은 서울에서 시위를 벌이던 학원 소요사태의 주동 학생 및 깡패 등 현실 불만 세력이 대거 광주로 내려가 사실무근한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렸기 때문이다."

이때 당국의 대책이 뭔지는 모르지만 도청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그날 아침 도청을 포위한 공수부대원들에게 실탄이 지급된 이후였다. 아마 이것이 당국의 대책인 듯하다. 실탄을 지급한 마당에 다른 대책이 뭐가 있겠는가. 깡패, 날조된 유언비어 때문에 광주 시민이 흥분했다는 발표 내용은 당연히 유혈 진압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21일 오후에는 계엄사령관의 담화가 발표돼 언론에 보도됐다. 21일 방송과 22일 신문에 실린 담화문에서 ''광주 사태''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그리고 "광주사태는 타 지역 불순인물과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지역감정과 관련된 악성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공공시설을 파괴하고 불을 지른 데서 기인한다"고 원인을 설명했다.

오전 발표에서 등장한 ''시위학생과 깡패'' 등 현실불만세력이 사라지고 ''불순인물과 고정간첩''이 주범으로 등장한 것이 다르다. 앞의 발표와 뒤의 발표가 몇 시간 만에 달라졌다는 걸 알았다 해도 그걸 보도할 언론은 물론 없었다.

이때부터 전국의 언론은 파괴된 시가지와 불타는 차량 사진을 보여주며 선량한 시민들이 수습복구 노력에 나섰다는 보도를 사진과 함께 계속했다. 또 시간 경과에 따른 사건일지를 보도했는데 공수부대 진압 일정은 빠지고, 시위 폭동과 관련된 일정들만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24일에는 서울역에서 간첩을 잡았는데 그 임무가 광주에 침입해 시민을 선동하는 것이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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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의 이름은 ''사태''이었다

이때만 해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보도에서 격이 달랐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당장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다. 국가 안위를 위해 빨리 해결하자''고 하고 동아일보는 24일 자 사설에서 ''통분할 일이고 통한의 사건인데 미봉책은 금물''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뭐가 잘못이고 뭐가 통분이고 통한인지는 전혀 설명이 없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행간을 통해서라도 광주에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졌음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동아일보 24일자 사설을 이야기하는 까닭은 19일부터 23일까지 5일간 동아일보는 사설 없이 신문이 발행되었다. 당시 군부의 언론검열단이 서울시청에 설치돼 신문 기사를 통제하고 있었는데 동아일보 사설을 이리저리 잘라내고 되돌려 보내 글이 이어지지 않았던 것. 동아일보는 항의와 저항의 표현으로 사설 없이 신문을 찍어냈다.

4컷 짜리 시사만화 ''고바우영감''도 8일간 지면에서 사라졌다. 이것만으로도 광주전남 지역에서는 동아일보에 대한 신뢰가 대단했다. 그 당시 어디 기자냐 물으면 동아일보라고들 대답해 광주 전남에서 나다니는 기자는 죄다 동아일보 기자였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남아 있다.

광주민주화 항쟁의 맨 처음 명칭은 ''광주에서의 폭도들의 무력 난동''이었다. 그리고 5공화국 내내 ''광주사태''로 불리다가 6공화국 초에 이르러 ''광주민주화 노력''이라고 제 모습을 찾기 시작해 결국 10년 세월이 흐른 뒤에 ''광주 민주화 항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1987년 ''6월 항쟁''이 있기까지 대부분의 언론은 ''광주사태''로 적고 매년 5월에만 잠깐 보도했다. 그것도 광주학살의 책임원흉을 처벌하라고 시위에서 구호가 나오면 그대로 받아쓰는 정도였다. 학생들이 시위에서 주장했다는 사회면 시위기사일 뿐 광주에서의 진실이 뭔지를 밝히는 기사는 물론 없었다. 역시 가장 각광 받은 신문은 동아일보. 다른 언론사에 비해 시위 기사도 크게 다뤘고 추모 시위, 가톨릭 광주 교구의 미사와 미사 뒤 거리행진, 대학가 기념식 등이 비교적 두루 다뤄졌다는 평가이다.

◇광주의 이름, ''항쟁''이 되다

1985년 전두환 정권을 여소야대로 몰아갈 뻔한 ''2·12총선''이후가 광주민주화항쟁 보도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 시점이다. 김대중-김영삼 두 야권 지도자의 성명이 발표되면서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요구 기사''들이 사회면 시위 기사가 아닌 정치면에 실리기 시작했다. 또 시위 현장의 사진들이 간간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은 전혀 변하지 않고 광주 폭동 내지는 광주사태로 다루다가 1987년 민주항쟁 이후인 1988년부터 돌변했다. ''광주의거''라고 부르고 진상을 밝혀야 한다는 얼굴 두꺼운 보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5.18이 광주민중항쟁이라고 가장 먼저 주창한 언론은 놀랍게도 조선일보였다. 그때만 해도 정부는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라고 불렀는데 조선일보가 앞서 나간 것이다. 역시 대단한 조선일보.

오늘날의 언론 상황을 보면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경제학의 가설은 언론학에 더 타당한 듯하다. 동아일보는 멘탈붕괴에 놓여 있고, 방송은 변함없고, 조선일보는 더욱 괴물이 되었다.

"언론이란 모두 전선 위에 앉아 있는 한 무리의 참새들이다. 어느 한 마리가 다른 전선줄 위로 날아가 감전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면 모두 그곳으로 날아간다." -워싱턴 포스트의 월터 핀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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