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립 130주년을 맞은 제일영도교회 외경. 이강현 기자올해로 설립 130주년을 맞이한 부산 영도구의 제일영도교회(담임목사 강화구)가 걸어온 길은 그 자체로 한국 근대 교회사이자 영도 지역의 역사다.
개항기 영도 땅끝 마을에서 시작해 130년 동안 지역 주민들의 영적 안식처가 돼온 제일영도교회.
부산CBS는 제일영도교회 강화구 목사를 만나 130주년을 맞이한 감회와 교회의 역사적 발자취, 그리고 앞으로 그려갈 미래 비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시골 땅끝 마을에서 피어난 130년의 역사,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다
"한국 교회사적으로도 130년을 이어오는 교회가 드문데 이 시골 영도 땅끝 마을에서 130년째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는 것에 특별한 감회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제일영도교회 100년사를 설명하고 있는 강화구 담임목사. 이강현 기자설립 130주년을 맞이한 강화구 목사의 첫마디는 겸손하면서도 묵직했다. 강 목사는 130이라는 숫자가 주는 깊은 감사 이면에 무거운 책임감도 동시에 느끼고 있다고 털어놨다. 오랫동안 이어왔던 교회의 빛나는 전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급변하는 시대에 발맞춰 다음 130년의 바통을 어떻게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어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지난 4월 넷째 주, 온 세대가 함께 모여 뜻깊은 130주년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강 목사는 특히 그날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고 전했다.
"그날 예배에는 우리 교회의 설립자인 김치몽 옹의 후손들이 참석하셨는데 전국과 세계 각지에서 무려 7대손까지 포함해 20명 남짓한 분들이 모여 특송을 불러주셨습니다. 그분들이 사회 곳곳에서 아름다운 신앙적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위로와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외에도 교회는 지역 청소년들을 위해 찬양팀 '위러브(WELOVE)'를 초청해 세미나와 찬양 집회를 열었고, 다음 세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는 글짓기와 그리기 이벤트를 통해 교회의 역사적 의미를 마음 깊이 새겼다.
다가오는 가을에는 교단의 선교 역사를 계승하는 의미로 한 분의 선교사님을 더 파송하는 선교사 파송식도 준비하고 있다.
외국 선교사 없이 평신도가 세운 독특한 자생적 교회
제일영도교회는 한국의 수많은 근대 교회가 외국 선교사들의 주도로 세워진 것과 달리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신앙 공동체로 출발했다는 독특하고도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일영도교회 100주년 기념 전시관. 이강현 기자교회 설립자는 조선시대 정삼품 당상관을 지낸 김치몽 옹이다. 통영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후 제사 문제 등으로 집안의 극심한 핍박을 받았던 그는 숨어들 곳을 찾다 배를 타고 영도로 도망쳐왔다.
그리고 1896년 4월, 영도에 마련한 자신의 집을 열어 주변 이웃들과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제일영도교회의 위대한 첫걸음이 됐다.
이후 성도들이 늘어나자 1900년 이천호 장로가 자신의 집을 제공해 첫 기와집 예배당을 마련했고,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선교사들을 찾아가 "우리에게도 와서 사역해달라"고 청하기에 이르렀다. 교회가 먼저 자생적으로 서고, 선교사를 거꾸로 초대한 독특한 '자립·자전'의 모델인 셈이다.
일각에서 설립자인 김치몽 옹을 '의주 출신'으로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 강 목사는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바로잡기도 했다.
"김치몽 옹은 통영 출신이 맞습니다. 의주 출신이신 분은 1912년에 부임해 이듬해 첫 당회를 조직하신 초대 한승용 목사님이십니다. 우리 교회는 1913년 제1회 당회록부터 현재까지의 당회 기록이 100%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이러한 교회의 역사를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사와 영도 근대사에 새겨진 굵직한 발자취
130년의 세월 동안 제일영도교회가 한국 교계와 영도 지역 사회에 남긴 유산은 실로 거대하다.
1960년대부터 사용했던 예배 시작을 알리던 종과 SFC 발상지 교회 기념 동판. 이강현 기자강 목사는 신앙적인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 중 하나로 SFC(학생신앙운동)의 태동을 꼽았다. 해방 이후 신사참배 등으로 영적 침체를 겪으며 모두가 낙심해 있을 때, 이 교회 청년들이 모여 시작한 뜨거운 기도 모임이 발전하여 오늘날 한국 교회와 전 세계로 확대된 학생선교단체 SFC의 모체가 됐다.
또, 지역 사회의 지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분립 개척의 역사도 빼놓을 수 없다.
과거 교통이 낙후되고 영도 산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이 많았던 시절, 제일영도교회는 성도들을 배려해 교회를 적극적으로 분립시켰다.
1949년 제2·3·4영도교회를 동시에 개척한 것을 시작으로 제5영도교회의 자립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조도에 있던 제6영도교회가 섬 밖으로 나와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제7·8영도교회는 자생적으로 설립됐으나 같은 고신 교단의 역사적 전통을 잇고자 스스로 이름을 '영도교회'로 지었다.
비록 개척 과정에는 차이가 있지만 지교회 네이밍의 독특한 전통을 함께 완성해 나갔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겼다.
놀라운 것은 한국 의료 선교의 중심인 고신대학교복음병원의 태동 역시 제일영도교회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강 목사는 "제3영도교회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그 마당에 천막을 치고 구호 병원을 시작한 것이 고신대학교복음병원의 모태가 됐다"면서 "당시 고신의료원을 설립하고 사역했던 주역들이 모두 제일영도교회의 성도들이었다"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회고했다.
6·25 전쟁 시절에는 갈 곳 없는 피란민들에게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거처를 제공하는 등 항상 영도 주민들의 든든한 안식처이자 동반자로 함께 호흡해 왔다.
고령화 시대의 이웃 사랑, 그리고 '소수 정예'를 향한 미래 비전
현재 영도 지역은 급격한 인구 감소와 고령화라는 사회적 대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강 목사는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회가 펼치고 있는 구체적인 지역 사회 섬김에 대해서도 말을 이어갔다.
교회는 코로나19 시기부터 독립적인 '이웃사랑위원회'를 조직해 매년 2500만 원 이상의 기금을 마련, 영도구청과 긴밀하게 협업하고 있다.
특히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독거노인들을 위해 매일 우유와 요구르트, 반찬 등을 배달하며 어르신들의 안부를 밖에서 확인하고 말벗이 되어 드리는 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또 지역 내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을 추천받아 매달 장학금을 적립한 뒤 6년 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할 때 목돈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인재 양성 사업도 묵묵히 이어가는 중이다.
"노령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지역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도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의지를 굳게 가지지 않으면 결코 쉽지 않은 사역이지만,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기에 멈출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강 목사는 에스라 7장 10절을 평생의 목회 철학으로 삼고 있다고 밝히며 다가올 미래 세대를 향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스스로 준행하며, 이를 온전하게 가르치겠다는 다짐이다. 미국에서 13년간 유학하며 신학을 공부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그는 믿는다.
강 목사의 목회 모토는 '오직 성경, 전체 성경'이다. 성도들이 좋아하는 말씀만 취사선택하는 편식을 막고, 성경 전체를 올바르고 균형 있게 먹이기 위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체를 다 풀어서 강의하는 20년 장기 플랜을 세워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다음 세대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양이 줄어들었다면 이제는 더 많은 자원을 가지고 소수에게 깊이 집중해야 할 때입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훨씬 더 영적으로 단단하고 영향력 있는 사람을 길러낼 수 있는 최적의 시스템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특히 제 목회 여정 동안 하나님 말씀에 대한 자존심을 고양시키고, 작은 숫자의 아이들이라도 말씀의 반석 위에 바로 세워 한국 교회에 선한 영향을 끼치는 건강한 교회로 다음 130년의 바통을 이어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