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화씨가 홀로 거주하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의 한 쪽방. 침대와 TV, 세탁기 등을 제외하면 사람 한 명이 겨우 앉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이원석 기자| ▶ 글 싣는 순서 |
①[단독]20년 전 '처치곤란 유명인'은 잔반통 뒤지는 노숙인이 됐다 ②미국도 '탈북자' 인정했는데…엄마는 '불체자'로 세상 등졌다 ③"난 중국말도 못하는 북한 사람"…난민도 안 되는 '유령'들 (계속) |
"중국말 하나도 모릅니다. 북한 사람으로 컸죠." 평안북도 구성시의 작은 촌 동네. 윤성화(64·가명)씨가 유년 시절 풍경을 떠올렸다. 매일 학교가 끝나면 동네에 도착해 폭 3~4m의 좁은 골목을 뛰어다니며 친구들을 찾았다. 골목길을 끼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 큰 목소리로 앞집 친구를 부를 때면 어김없이 맑은 얼굴로 뛰어나오던 친구가 그립다고 했다.
골목길 밖으로는 조금 넓은 도로가 있었다. 그곳은 동네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였다. 구슬치기, 술래잡기 등 온갖 놀이를 했던 기억이 난다고 한다. 빈 깡통을 구해다가 깡통차기를 하고 놀 때면, 성화씨는 늘 영웅이었다고 한다. 달리기가 빠른 편이었던 성화씨는 늘 술래에게 잡히지 않고 깡통을 차서 술래에게 붙잡힌 아이들을 풀어주었다. 놀이가 끝날 때쯤에는 할머니가 주신 용돈으로 사 먹었던 북한 대표 간식 콩사탕과 간유사탕의 그 달콤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가장 강렬했던 기억은 강가에 물고기를 잡으러 나갈 때였다. 동네에서 15분 정도 걸어가면 작은 강이 하나 있었다. 강 속은 물 반 고기 반이었다. 친구가 부모님 몰래 꺼내 온 음식을 조금 가져다가 떡밥으로 쓰면, 그날은 잔칫날이나 마찬가지였다. 무거워서 들지도 못할 정도로 통발에는 물고기가 가득 찼다. 그러면 낙엽 등을 가져다가 나뭇가지로 불을 피우고, 어죽을 끓여 먹었다. 유년 시절 북한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의 추억이다.
성화씨는 평생 자신을 북한 사람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북한 학교에 다녔고, 북한 역사를 배웠다. 매일 교실 벽에 걸린 김일성의 초상화를 보며 공부했고, 매년 김일성의 신년사를 외워 낭독했다. 학교가 요구하는 정치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남들과 마찬가지로 배급도 받아 배를 채웠다. 북한에서 나고 자란 그는 친구도 이웃도 모두 북한 사람들이었다.
윤성화씨가 회상한 어릴 적 풍경. AI생성 이미지성화씨의 부모는 중국 태생이다. 하지만 성화씨의 부모도 세 살 무렵 북한으로 건너와 북한에서 자라며 스스로를 북한 사람으로 여겼다. 특히 성화씨의 아버지는 실제로 북한 국적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북한 선거에도 참여할 정도로 명백한 북한 공민으로 살아왔다고 한다. 북한에서 살아가는 동안 그들을 중국 출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러던 1980년대 어느 날, 난데없이 성화씨의 손에는 '화교 출생증'이 주어졌다. 가지고 있던 '조선 출생증은' 버려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 역시 더 이상 북한 공민이 아니라고 했다. 갑작스레 북한 당국이 중국 출신 주민들에게 "중국으로 갈 사람은 가라"며 화교 신분을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북한 사람이 아닌, 중국계 외국인이 됐다.
쫓겨나듯 나가는 주민들을 보면서도, 아버지는 중국으로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미 일생을 북한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성화씨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북한 사람'으로 살아갈 계획이었다.
윤성화(가명)씨가 매일 먹고 있는 약. 윤성화씨는 심장 혈관이 막혀 반년에 한 번씩 병원에 들러 검사를 받고 약을 받아 온다. 이원석 기자그렇게 북한에서 평범한 삶을 이어가던 중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는 인생의 변곡점이었다. 2010년쯤 뇌졸중에 걸려 중국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병세는 쉬이 좋아지지 않았다. 1년이란 시간이 지났을 무렵, 그는 심양 영사관 측으로부터 '더 이상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해외 체류 기한이 지났고, 연장도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그렇다고 성화씨는 중국에서 '자국민'으로 인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갈 곳을 잃은 성화씨. 그의 선택은 대한민국이었다. 북한에서도 종종 자유와 번영의 남한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스쳤지만, 차마 엄두가 나지 않아 옮기지 못했던 탈북. 어쩌면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게 중국 내 한 가정교회로부터 브로커를 소개받은 그는 2013년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다.
성화씨는 당연히 탈북민 신분을 인정받을 줄 알았다. 제대로 된 중국말 하나 하지 못하는 그가 한국에서도 중국인으로 판정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부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는 그를 중국인으로 봤고, 결국 그는 국적을 받지 못한 채 출입국관리소로 옮겨졌다.
성화씨는 언제라도 생명이 위독해질 수 있을 만큼 지금도 건강이 좋지 않다. 심장이 멈췄다가 다시 뛰는 일이 반복됐다. 어쩌면 그는 무국적자로 생을 마감해야 할 수도 있다. '무국적자로 한국에서 살아남기' 투쟁은 이제 서서히 힘이 달린다.
北에서 정치적 박해 받았다는 걸 증명하라니
윤성화(가명)씨의 외국인등록증. 이원석 기자그렇게 방문동거(F-1) 비자로 근근이 체류자격을 연장하며 치료받던 성화씨는 난민 자격이라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성외국인보호소에 있을 당시 한 차례 혼자서 난민 신청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몇 년 뒤인 2019년 6월 탈북자 지원 단체 탈북난민인권연합의 도움을 받아 비슷한 처지에 놓인 탈북민 3명과 함께 한 차례 더 난민 신청을 했다.
하지만 2년여가 지난 2021년 11월, 그의 손에 돌아온 것은 불인정 통지서였다. 난민 신청이 받아들여지려면 난민법에 따라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는 사실이 있어야 하는데, 이를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정치적으로) 압박받았다는 확인서를 가져오라는데, 그게 말이 됩니까. 북한에 다시 가서 서류 받아오라는 건 죽으라는 소리죠." 성화씨는 허탈한 표정으로 말했다.
또 법무부는 이들이 중국으로 보내져도 북한으로 송환되지 않을 것이고, 중국 정부에서 이들에게 중국 국적을 부여할 것이라는 황당한 판단도 덧붙였다. 중국에서는 성화씨를 '북한 사람' 취급했는데, 한국에 오니 이번에는 '중국 사람'이라니. 성화씨는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다. 그는 "이제는 중국으로 가봤자 북한으로 추방될까 두려워 중국으로 가볼 시도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윤성화(가명)씨가 받은 난민불인정통지서의 일부. 탈북난민인권연합 제공법무부 난민위원 출신인 장복희 선문대학원 국제법학과 교수는 "북한 형법에 따라 북한 공민들은 다른 나라로 도망쳤거나 투항, 변절하면 최대 사형에까지 이를 수 있다"며 "(재북 화교들도) 법적으로 공민이 아니더라도,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 주민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충분히 북한 형법의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국적을 받으려 했고, 난민 신청까지 했던 사실이 알려지면 사형의 위험까지도 있기 때문에, 충분히 정치적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은 "실제로 2010년에 재북 화교가 중국으로 추방됐다가 북한으로 송환돼 총살을 당한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성화씨도 주변 인물들이 혹여나 북한에서 피해가 갈까 두려워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있다.
장 교수는 "중국인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해도 난민 지위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제1조 C항에 따르면 난민 신분을 준 뒤 다른 국적국의 보호를 받게 되면 난민 지위를 멈출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국적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설명이다. 장 교수는 "난민위원회가 매우 보수적이고 인색한 기준으로 판정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법무부의) 의지만 있다면 난민 인정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사람답게 죽고 싶다"
서울 관악구 봉천동 한 골목에 있는 윤성화(가명)씨의 거주지. 이원석 기자성화씨 몸에는 링거와 주사가 따라다닌다. 심장 혈관 세 개가 모두 막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수차례, 혈관 한 개를 간신히 뚫어 연명하고 있다.
하지만 무국적자의 병원비는 버티기 어려운 수준이다. 반년마다 150만 원을 내고 검사를 받고 약을 받아오지만, 교회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한번은 수술비로 700만 원이 나오는 바람에 주변에 구걸하듯이 돈을 모으기도 했다. 성화씨는 시민단체가 지원하는 30만 원, 교회에서 받는 15만 원으로 월세와 생활비를 겨우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국적이 없어 기초생활수급 대상은 되지 못한다. 매달 15만 원가량의 건강보험료를 내고 나면 하루살이처럼 매일을 보낸다.
윤성화(가명)씨의 집 한편에는 세탁기와 화장실이 같이 있다. 이원석 기자
그는 어쩌면 죽음이 머지않았다고 느낀다. 무국적자로 변변한 직업을 얻지도 못한 채 한국 땅에서 살아온 그는 이제 지쳤다. 만날 수 있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많지 않다. 주일에 교회를 가고, 탈북민지원단체를 찾아 시간을 보낼 뿐이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온 성화씨의 마지막 바람은 국적을 인정받는 것이다. 국적을 인정받아 복지혜택을 조금이라도 누리고, 그걸 토대로 북한과 중국에 남아 연락이 끊긴 가족들과 재회하는 정도.
"내 새끼들이 너무 보고 싶지만, 방법이 있나요. 그냥 죽을 때만이라도 국적이 있는 상태로 사람다운 취급 받았으면 좋겠다는 게 전부예요." 죽기 전 그의 마지막 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