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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5년 전 속헹이 죽어간 그곳…또다른 '속헹'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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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속헹 사망 5년, 여전한 이주노동자 불법 기숙사
월세 20만 원 아딧의 방엔 부탄가스와 곰팡이로 가득
"춥다" 말하면 잘릴라…"일터 좋다" '생존의 침묵'
표 없는 이주노동자 지자체·고용노동부 '책임 전가'
"대안 없는 사업 철회? 지난 5년 정책은 '쇼' 자백"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숙소. 김수진 기자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숙소. 김수진 기자
"여기, 검은 천 덮인 거 보이죠? 저게 다 기숙사예요. 저 옆에 회식 비닐도, 저 뒤에 창고 같은 것도 다 사람이 사는 집입니다"

지난 4일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끝이 보이지 않는 농로 위로 띄엄띄엄 크고 검은 '덩어리'들이 눈에 띄었다.

5년 전, 캄보디아 노동자 고(故)속헹씨가 영하 18도의 한파 속에 숨졌던 그곳, 바로 그 비닐하우스다. 농작물 창고 같지만, 낡은 슬리퍼와 빨랫줄에 널린 작업복들은 이곳이 집임을 알리고 있었다. 5년이 지났는데도 이곳의 시간은 멈춘 듯 했다. 이곳에는 이름만 다른 속헹이 여전히 추위속에 살고 있었다.

"일터가 바로 옆이라 좋아요"… 23살 청년의 슬픈 거짓말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숙소. 김수진 기자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숙소. 김수진 기자
검은 막으로 덮힌 실내는 대낮에도 동굴처럼 어두웠다. 샌드위치 패널로 얼기설기 엮은 불법 가건물 안에는 한 평 남짓 좁은 방에는 태국에서 온 청년 아딧(가명·23)이 산다.

그는 지난해 10월 입국했다. 속헹 사건 이후 "이주노동자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겠다"고 한 한국 정부의 수많은 공언들은 그의 '기숙사'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앳된 얼굴로 자신의 외국인 등록증(E-9 비자)을 꺼내 보여준 아딧은 수줍은 표정으로 자신의 '보금자리'를 소개했다.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불법 비닐하우스 숙소 내부. 김수진 기자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불법 비닐하우스 숙소 내부. 김수진 기자
방 안 침대 머리맡 바닥에는 휴대용 가스버너와 식용유, 계란판이 뒤엉켜 있다. 잠자는 곳과 밥 짓는 곳이 분리되지 않은 방. 화재가 발생하면 대피는 물론 더 큰 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벽지는 습기를 머금어 거뭇거뭇하게 썩었고, 영하의 추위를 피할 곳은 바닥에 깔린 전기장판 하나뿐.

컨테이너 한켠에 자리한 공동 화장실에는 아딧이 이곳에 오기 훨씬 전부터 붙어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색바랜 경고문이 눈에 들어왔다.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불법 비닐하우스 숙소 내부에 있던 화장실 앞 경고문. 이곳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오기 수년 전부터 해당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김수진 기자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불법 비닐하우스 숙소 내부에 있던 화장실 앞 경고문. 이곳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오기 수년 전부터 해당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김수진 기자
'9:00. 샤워 9시 하지 마주세요(마세요)'

1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남녀 구분 없이 이 화장실을 함께 쓴다고 했다. 물소리로 시끄럽다는 이유에서 9시 이후에는 씻지 말라는 경고문이었다. 빨래는 속옷과 양말, 외출복이 화장실 내부에 뒤엉켜 걸려 있었다. 변기는 깨진지 오래고, 벽은 틈새가 벌어져 날카로운 겨울 바람이 스며 들었다.

아딧은 이곳에 사는 대가로 매달 20만 원 안팎의 기숙사비를 낸다. 그런데도 그는 CBS노컷뉴스 취재진을 향해 "사장님이 일하게 해줘서 좋다"며 연신 웃으면서도, 혹여나 비자 연장을 받지 못할까 봐 걱정이라고 했다.

이 지역에서 이주노동자의 열악한 주거 문제 개선을 위해 애써온 김달성 목사(포천 이주노동자 센터 대표·71)는 "재계약 권한을 가진 사장님에게 춥다고 말하는 순간 쫓겨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가장 약한 자의 생존 본능"이라고 했다.

"우린 권한이 없다"…고용노동부와 지자체의 잔인한 '핑퐁 게임'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 불법 비닐하우스 숙소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개인 빨래가 널린 모습. 김수진 기자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 불법 비닐하우스 숙소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들의 개인 빨래가 널린 모습. 김수진 기자
속헹씨 사건 이후 5년이 흘렀지만 이주노동자들의 주거 여건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앙정부와 지자체는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우선 일차적 책임은 인력 배정 권한이 있는 고용노동부에 있다.

현행 농지법 제34조에 따르면, 농지에 농작물 경작 목적이 아닌 주거용 시설을 짓는 것은 불법이다. 사람이 사는 거주 시설을 지으려면 '농지 전용 허가'를 받아 대지로 변경해야 한다. 아울러 건축법 제20조에 따라 컨테이너 등 가설건축물은 지자체에 신고해야 하고, 임시 창고나 숙직 외에 주거용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 소방 시설이나 단열 등 주거 안전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도 2021년부터 불법 가설건축물을 숙소로 제공할 경우 고용 허가를 내주지 않기 위해 근로기준법 및 고용허가제 지침을 변경했다.

이에 농장주들은 애초에는 "이주노동자에게 기숙사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신고하고 이주노동자들을 배정받는다. 하지만 일단 배정받은 뒤에는 그들의 신고할 수 없는 처지를 악용해 열악한 비닐하우스에 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숙소 공동 화장실. 김수진 기자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숙소 공동 화장실. 김수진 기자
이같은 농장주들의 불법 행위에 대한 단속 업무는 기초지자체의 역할이다. 하지만 지자체 역시 지역 농민들의 '표심'을 의식해 단속에 소극적인 게 현실이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기초지자체인 시군은 농민들 편이라 제대로 된 단속을 못 한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농장주가 '집 없으면 일 못 시킨다'고 버티면, 노동자들도 당장 갈 곳이 없으니, 불법이라도 감수하겠다고 한다"며 "그러니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가 20년째 굳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노동부가 불법 기숙사를 제공하고 있는 농장으로 이주노동자들을 보내고, 기초지자체는 이같은 불법을 눈감아주는 사이, 광역지자체인 경기도에서는 그나마 있던 지원마저 끊겼다.

경기도는 2026년도 '외국인 노동자 기숙사 건립 지원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2023년 27억 원으로 시작했던 사업은 "수요가 없다"는 이유로 3년 만에 폐지됐다.

지자체가 불법 숙소를 단속하지 않으니, 농장주들과 일선 시군은 굳이 돈을 들여 합법 기숙사를 지을 유인이 사라진 탓이다.

대법원은 '불법'이라는데… 예산 아끼려다 '혈세'로 배상할 판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야외 재래식 화장실. 이곳에서 거주하던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쓰던 화장실이지만, 최근 불법 적발로 인해 사용되지 않고 있다. 김수진 기자경기도 포천시 가산면의 한 농경지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야외 재래식 화장실. 이곳에서 거주하던 여성 이주노동자들이 쓰던 화장실이지만, 최근 불법 적발로 인해 사용되지 않고 있다. 김수진 기자
지난달 29일 대법원은 속헹씨 사건에 대해 '한국 정부가 유족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최종 결론냈다. 사법부가 주거 환경에 대한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이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과 관련 이주노동자의 주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더 큰 청구서로 돌아올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가 나온다.

속헹씨 사건을 대리했던 최정규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은 국가와 지자체가 불법을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경고"라며 "지자체가 불법 기숙사를 방치해 제2의 속헹씨가 나오면, 그 배상금은 고스란히 시민들의 혈세로 나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현장 실태는 그대로인데 원인 분석도 없이 지자체가 기숙사 건립 예산을 없앤 건, 지난 5년간의 지원 정책이 그저 여론 무마용 '쇼(Show)'에 불과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라며 "인권의 관점에서도, 국가 경제 관점에서도 주거 문제 해결이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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