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미국이냐, 중국이냐?"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화하면서 한국 외교가 끊임없이 마주해온 질문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을 요구해온 쪽은 대체로 동맹인 미국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다. 선택이 가능하려면 선택의 대상이 예측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외교에서 선택은 결단이나 신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남이가'식으로 접근해서도 안 된다. 냉철한 계산의 결과여야 한다. 상대가 무엇을 원하고 어디로 가려는지를 읽을 수 있어야 전략적 선택이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은 이 전제가 무너졌다. 특히 미국이 그렇다.
원래 워싱턴의 안보 전략가들은 상대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를 매우 중시한다. 특히 적대적 대상일수록 더욱 그렇다. Enemy(적·적국), Adversary(적대자·대항자), Threat(위협), Challenge(도전 요인), Competitor(경쟁자) 등으로 부르는 방식도 다양하다. 대상을 무엇으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전략과 목표가 달라진다. 총과 칼로 맞서야 할지, 몽둥이로도 충분할지를 판단하려면 위협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선행돼야 한다는 논리다. '적'이나 '적대자'가 제거의 대상이라면, '경쟁자'는 겨뤄서 이기면 그만이다.
미국에게 '중국'은 무엇일까? 2017년 트럼프 1기는 중국을 미국의 가치와 이익에 반하는 세계 질서를 구축하려는 '수정주의 국가'이자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했다. 중국이 미국과 함께 '글로벌 문제를 해결할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기존의 기대에 종지부를 찍은 선언이었다.
바이든 행정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중국을 국제 질서를 재편하려는 의도와 이를 실행할 역량을 모두 갖춘 '유일한 경쟁자'로 못박았다. 인공지능(AI), 양자 컴퓨팅, 반도체 등 핵심 첨단 기술이 중국으로 유입되지 않도록 정밀한 규제를 가했고, 쿼드(Quad)와 아시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등을 활용해 동맹국들과 함께 대중국 포위망을 제도화했다. 그래서 '트럼프보다 더 트럼프스럽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트럼프 2기에는 중국과 '전면전'이라도 벌일 줄 알았다. 2024년 선거 운동 기간 중국을 '실존적 위협'으로 규정하며 '레짐 체인지(정권 교체)'까지 언급한 트럼프 참모도 있었다. '정권 교체'는 분명 지나친 표현이었지만, 적어도 중국을 제대로 한 번은 손볼 것이라는 관측이 뒤따랐다.
그러나 지난 1년간 드러난 트럼프의 대중국 기조는 좀처럼 종잡기 어렵다. 적어도 선거 과정에서 예고됐던 '중국을 제대로 손보는' 접근과는 거리가 멀었다. 손보기엔 중국이 너무 커버린 것일까. 우선 수사부터 누그러졌다. 국가안보전략(NSS) 등 핵심 안보 문서에서 중국은 이제 타도의 대상이 아닌, '상호 경제 관계의 재조정(rebalancing)'이 가능한 경쟁자로 재정의됐다.
연합뉴스완화된 것은 비단 말뿐만이 아니다. 2기 출범 직후 펜타닐 관세, 품목 관세, 상호 관세를 연달아 꺼내 들며 압박에 나선 장면을 제외하면, 이후의 정책 궤적을 전형적인 '강경론'으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지난해 말 트럼프 대통령이 인공지능(AI) 반도체 칩 등 첨단 전략 기술에 대한 대중국 수출 통제를 완화한 결정은 상당히 전격적이었다. 여당인 공화당 내부에서조차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에서 미국의 우위를 스스로 약화시키는 조치라는 비판이 제기될 정도였다.
미·중 간 '뇌관'인 대만 문제에서는 모호함이 더욱 짙어졌다. 워싱턴이 오랫동안 고수해온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보다 더 모호하다. 트럼프는 최근 중국의 대만 공격 가능성에 대해 "시진핑이 결정할 일"이라고 말했다. 대만 침공을 미국의 '레드라인'으로 규정하지 않은 것이다. 동시에 대만에는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하이마스)과 자폭형 드론 등 역대 최대 규모의 무기 판매를 승인하며 중국을 자극했다.
바이든 행정부 시절 '아시아 차르'로 불렸던 커트 캠벨 전 백악관 인도·태평양 조정관은 최근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이를 두고 "트럼프가 전략적 모호성을 전혀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캠벨은 이른바 '트럼프식 전략적 모호성'이 중국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시진핑과의 협상에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문제는 이러한 모호함이 동맹들까지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결정적인 순간에 중국 편에 서는 것은 아닌지, 미국을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지를 두고 동맹 내부에 이미 의구심이 싹트고 있다는 것이다. 캠벨은 결국 이러한 불신이 누적될 경우, 동맹국들이 자국 안보를 위해 핵무기 개발을 검토하거나 제3의 안보 연대를 모색하는 상황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트럼프식 전략적 모호성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일각의 지적처럼 중간선거를 앞두고 중국을 달랠 필요가 있는 단기적 전술일까. 아니면 미·중 패권 경쟁에서 승리를 노리는 트럼프식 '그랜드 전략'일까. 캠벨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것 역시 '캠벨식 모호함'일까. 그렇다면 "미국이냐, 중국이냐"라는 질문에 우리도 굳이 답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박형주 전 VOA 기자('트럼프 청구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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