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개발과 활용에 대한 첫 법적 기준인 AI 기본법이 오는 22일부터 시행된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AI 규제법을 전면 시행하는 국가가 된다. 정부는 AI 산업 진흥을 위한 제도라고 설명하지만, 업계에서는 적용 기준이 충분히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법이 먼저 시행될 경우 기업들이 보수적으로 대응할 수 밖에 없어 혁신 속도가 둔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이 때문에 AI 기본법 시행이 '독'이 될지 '득'이 될지는 향후 정부의 대응에 달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장에서 혼선이 없도록 세부 가이드라인을 얼마나 촘촘하게 마련하고, 국내외 기업에 대한 규제의 속도와 집행의 형평성을 어떻게 조율하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세계 최초 고영향 AI 규정·표시 의무 법제화… 현장서는 "구체적 기준이 없다"
21일 AI 기본법(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 시행을 하루 앞둔 가운데, 해당 법은 AI 산업 육성과 함께 윤리·안전성 기준을 제도적으로 정립하려는 취지로 마련됐다. 생명·안전·기본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을 중심으로 관리 체계를 세우겠다는 취지다.
법안에 따르면, AI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사업자는 AI를 활용하는 서비스나 제품에 이용자가 해당 결과물이 AI를 통해 생성·활용됐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도록 표시해야 한다. 사람의 창작물과 AI가 개입한 결과물을 구분해 딥페이크나 허위 정보 확산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카카오는 오는 4일부터 약관을 개정하고, AI 생성 결과물은 관련 법에 따라 고지·표시한다는 내용을 담을 예정이다.
또 에너지, 보건의료, 범죄 수사·체포, 교통 등 총 10개 분야는 '고영향 AI'로 분류된다. 국민의 생명·안전·기본권과 직결될 수 있는 영역인 만큼, 사전에 안전성 확보 조치를 의무화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고영향 AI로 분류되면 사업자는 안전성 관련 자료를 정부에 제출해야 하며, 정부는 이를 토대로 시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 법 위반이 확인될 경우 과태료 부과 등 강제 조치도 가능하다. 다만 정부는 제도의 연착륙을 위해 1년 이상의 계도기간을 두기로 했다.
그러나 법 시행을 눈앞에 두고도 이러한 규제를 실제로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세부 기준이 아직 충분히 마련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예컨대 영상이나 웹툰 등 콘텐츠 창작물에 AI 기술이 일부 활용된 경우, 어느 수준부터 'AI 생성물'로 표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어 현장에서는 혼선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한 IT 업계 관계자는 "기업이 당장 대응할 수 있는 핵심은 AI 생성물 사전 고지인데, 기준이 모호해 법 시행 이후 나올 가이드라인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우려는 해외 규제 흐름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규제 법안을 먼저 마련한 유럽연합(EU) 역시 같은 취지의 AI법(AI Act)을 승인했지만, 전면 시행 시점은 2027년으로 미뤘다. 기준과 세부 지침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법을 먼저 시행할 경우 기업 부담이 과도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EU는 전면 시행에 앞서 기업들이 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도록 사례 중심의 세부 가이드라인과 업종별 기준을 먼저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국내 기업·스타트업에 먼저 작동하는 규제…격차 확대 우려
업계를 중심으로는 규제 리스크를 의식한 기업들이 신기술 적용과 사업 확장을 보수적으로 가져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특히 규제의 초점이 의료·교통·콘텐츠 등 AI 혁신이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분야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국내 기업들의 실험과 상용화 속도가 늦어질 경우, 규제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은 해외 빅테크와의 기술 격차가 오히려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 과정에서 규제가 국내 기업에 먼저, 더 강하게 적용되는 '역차별' 가능성도 업계의 주요 우려로 꼽힌다. 국내 기업들은 법 시행과 동시에 즉각적인 대응이 불가피한 반면, 해외 빅테크 기업에 대해서도 동일한 수준의 규제 집행이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법은 해외 사업자에 대해서도 국내 대리인을 통해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대리인의 책임 범위와 집행 실효성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한 업계 관계자는 "같은 이슈가 국내 기업과 해외 기업에서 동시에 발생할 경우 국내 기업은 규제에 한 번 부딪히면 타격이 클 수 밖에 없다"며 "과연 오픈AI나 구글 같은 해외 빅테크에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쿠팡 사례에서도 보듯 사안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 통상 이슈로 번지면서 문제 해결이 쉽지 않았던 전례가 있다"며 "AI 기본법 적용 대상이 되는 해외 빅테크 기업의 경우에도 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고영향 AI 규정에 대한 선제 대응 여력이 부족해 부담이 크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법 대응에 필요한 인력과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규제가 기술 경쟁력의 격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국내 AI 스타트업 101곳을 조사한 결과, 대응 체계를 갖춘 곳은 2%에 그쳤고, 절반에 가까운 48.5%는 '법령은 알고 있으나 대응이 미흡하다'고 답했다.
업계에서는 무엇보다 정부의 대응 속도가 관건이라고 입을 모은다. AI 기술 발전 속도가 빠른 만큼, 가이드라인 보완과 기준 정비 역시 이에 맞춰 신속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AI 기본법에는 규제 성격의 조항도 담겨 있어 업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것이 기업의 발목을 잡는 규제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있었다"며 "기술과 트렌드 변화에 맞춰 제도가 빠르게 보완되지 않으면 국내 기업에만 족쇄를 채우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