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칭더 대만 총통의 초밥 인증샷(왼쪽), 린자룽 대만 외교부장. 연합뉴스대만 유사시 일본의 무력 개입을 시사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발언 이후 일본산 수산물 수입 재중단 등 일본에 대한 중국의 보복이 이어지고 있던 지난 20일.
라이칭더 대만 총통은 일본산 수산물로 만든 초밥을 먹는 사진을 SNS에 올렸다. "오늘 점심은 초밥과 미소국(일본식 된장)을 먹었다"고 적고 '가고시마산 방어'와 '홋카이도산 가리비'라는 해시태그도 달았다.
린자룽 대만 외교부장도 SNS에 "일본산 가리비 사시미를 큰 접시로 주문했다"는 글과 사진을 올렸다. 특히, "일본을 응원한다"면서 대만과 일본 국기 사이에 하트 이모티콘도 붙였다.
다음날 대만 위생복리부 식품약물관리서(식약서)는 후쿠시마 등 5개 현 식품 수입시 적용하던 산지 증명 첨부, 방사능 검사 등 제재를 해제하는 등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전면 재개하기로 했다.
그밖에도 대만 집권여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 정치인들은 중국의 '일본 여행 자제령'을 맞서 대만 정부가 일본 여행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일본에 대한 지지와 응원을 보내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대만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았나?'라며 대만 여권 정치인들의 이같은 행보에 고개를 갸우뚱할 만한 일이다. 한국 정치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노골적인 친일 행보이기 때문이다.
맞다. 대만도 1895년부터 1945년까지 50년간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특히, 일제 강점 말기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만인 21만명을 강제징집했다. 위안부로 끌려간 대만 여성도 2천여명에 이른다.
대만 외교부. 연합뉴스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양이 됐던 대만은 어째서 중국을 외면하고 일본을 응원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만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스트로네시아계인 원주민이 정착해 살던 대만에는 명·청시대부터 한족들이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이들을 '본성인'이라 부른다. 본성인의 대규모 이주 이후 원주민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본토에 비해 세력이 미약했던 본성인들 역시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로부터 사실상 식민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며 1895년 대만은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일본의 식민지배 초기 대만인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또, 일본은 역사상 첫 식민지인 대만을 성공적인 식민통치의 모범사례로 만들고 싶어했다. 대만인에 대한 유화적인 정책을 실시한 배경이다.
대만인들을 대상으로 근대화된 고등교육을 실시하고, 철도.항만.도로 등 기반시설을 확충하는 등 공을 들였다. 오죽하면 착취만 하는 청나라 때보다 일제 지배가 낫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1945년 일본의 패망 이후 대만은 중국 본토 국민당 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러다 4년 뒤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에 패퇴한 국민당 정부가 대규모로 대만으로 이주했고 이들은 '외성인'이라 부른다.
장제스가 이끈 외성인은 이주하자마자 본성인에게 반공·반일, 그리고 중국화를 강요하며 철권통치를 이어갔다. 1949년부터 1987년까지 무려 38년간 지속돼 세계 최장으로 기록된 계엄령이 대표적이다.
연합뉴스대만 인구 전체의 80%를 차지하는 본성인은 수십년간 외성인의 억압에 시달려야했고, 외성인의 독재는 2000년 치러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 후보로 나온 본성인 출신 천수이볜이 당선될때까지 이어졌다.
여기다 G2 국가로 올라선 중국은 대만을 일개 성(省)으로 간주하며 무력통일도 불사하겠다고 압박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국제사회에서 대만은 대부분의 나라와 국교가 끊기는 수모도 겪었다.
이같은 역사적 배경은 본성인, 그리고 국민당의 대척점에 선 민진당 정권이 왜 중국 보다 자신들을 식민 지배한 일본을 옹호하는지 이해하는데 어느정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대만은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외부 민족의 지배를 받았고, 독립 이후에는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같은 민족에게 탄압 받아왔다는 점에서 수천년간 이어져온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
따라서 '친일'에 대한 대만인과 한국인의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오히려 일본을 동경하고, 중일 갈등 국면에서 노골적으로 일본 편을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이런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대만이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친일 행보를 이어갈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대만을 둘러싼 정치·경제·외교 환경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대만을 거점으로 공산당에 빼앗긴 중국 본토 수복을 노리던 '반중' 국민당이 시간이 흐르며 중국 본토와 화해·협력을 주장하는 친중파로 변모한게 대표적이 사례다.
동시에 전임 차이잉원에 이어 라이칭더가 당선되며 민주화 이후 사상 처음으로 12년간 민진당이 장기집권하게 됐지만 대만 민심이 다시 한번 민진당에 기회를 줄지는 미지수다.
지난 2024년 총통 선거에서도 제3의 후보를 낸 민중당이 없었다면 민진당의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함께 치러진 입법위원(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진당이 과반 달성에 실패해 여소야대 정국이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만인의 절대 다수는 '현상유지'를 원하고 있고, 미국발 AI 열풍에 대만의 반도체 산업이 수혜를 입으며 대만 수출 경제가 활황이지만 밑바닥 민심에서는 민진당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
중국과 갈등을 키우는 민진당 정부의 노선으로 인해 대만해협을 둘러싼 군사적 긴장감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또, 반도체 산업은 잘나가지만 대중국 의존도가 높은 민생분야는 오히려 더 위축되고 있다.
대만 국립정치대학의 정례 여론조사에서 2024년만 해도 라이칭더 정부의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 처리에 대해 '만족한다'는 응답 비율은 44%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응답 비율(43%)과 엇비슷했다.
하지만 2025년 조사에서는 만족한다는 응답 비율이 26%로 크게 떨어지고 만족하지 않는다는 응답 비율은 63%로 급등했다. 현상유지는 원하지만 더이상의 갈등 격화는 원하지 않는다는 민심으로 읽힌다.
정치 지형의 변화는 대만과 일본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민진당 정권은 중국 견제에 일본에 이용해 왔지만 국민당 등 야권은 양안관계에 일본을 끌어들이는걸 부담스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