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 싣는 순서 |
①야마모토의 가슴을 친 친정 오릭스 구단의 작별 인사 ②'상남자' 구로다를 울린 히로시마 팬들의 현수막, 그리고 커쇼 |
2016 시즌 퍼시픽리그에서 우승한 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선수들이 구로다 히로키를 헹가래치고 있다. 사진=히로시마 도요 카프 홈페이지미국 메이저리그(MLB) LA다저스의 야마모토 요시노부(27.山本由伸)는 올해 포스트시즌을 정복하면서 2연속 완투승을 거뒀다.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NLCS) 2차전과 월드시리즈 2차전이다. NLCS 완투승은 일본인 최초의 포스트시즌 완투승이었다.
종전 일본인 투수의 포스트시즌 한 경기 최다 이닝 기록은 2012년 아메리칸리그 디비전 시리즈 3차전에서 작성된 8⅓이닝이었다. 그 기록 보유자는 당시 뉴욕양키스 소속의 '상남자' 구로다 히로키(50.黒田博樹)이다.
구로다는 일본의 레전드 투수이지만 야마모토와는 달리 다승왕을 1차례 했을 뿐 리그 MVP도, 사와무라상(최고 투수상)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41살까지 선발로 활약하며 일본인 최다인 미일 통산 203승을 거뒀고, MLB에서 노모 히데오(7번)와 박찬호(6번)에 이어 세 번째로 10승 이상 시즌을 5차례 기록했다. 미국 진출 이전 11시즌 동안 74차례 완투를 하며 '미스터 완투'로 불리는 등 타고난 철완과 놀라운 자기 관리로 존경을 받았다.
오사카 우에노미야 고교 시절의 구로다 히로키. 3년간 후보(보결)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진=구로다 히로키 다큐 유튜브 캡처구로다는 야마모토보다 더한 대기만성형이었다. 프로야구 선수 출신 아버지와 투포환 선수였던 어머니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영 신통치 않았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감독이던 소년팀에서 야구를 시작했지만 고교에 가서도 빛을 보지 못했다. 오사카의 야구 명문에 진학했지만 느린 구속 때문에 패전처리용 후보를 전전했다. 결국 일본 전국고교야구대회인 고시엔(甲子園) 본선은커녕 예선에서도 던져 보지 못했다.
당연히 프로의 입단 제의는 없었고, 실망한 구로다를 아버지는 대학까지만 해보자고 설득했다. 구로다는 약체인 도쿄 센슈대학 야구부에 들어가 비로소 주전으로 등판하기 시작했고 3학년이 되자 시속 150km를 넘는 강속구를 뿌리며 각성했다. 이제는 드래프트 2순위로 여러 구단의 러브콜을 받았지만 구로다는 가난한 시민 구단 히로시마 도요 카프를 선택했다. 자신을 알아봐 준 오릭스를 택한 야마모토처럼 대학 초기부터 관심을 가져줬다는 이유였다. '상남자'의 시작이었다.
1997년부터 선발로 나선 구로다는 2006년까지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해 동메달을 땄고 2005년에는 15승으로 다승왕을 차지했다. 2006년에는 첫 1점대 방어율(1.85)로 1위를 기록하면서 FA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일본 야구사에 남을 드라마가 막을 올린다.
FA가 된 구로다에게 일본 최고 인기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4년 30억 엔을 제시하며 영입에 나섰다. 반면 가난뱅이 소속팀 히로시마의 제안은 4년 10억 엔에 불과했다. 구로다는 떠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히로시마 팬들은 분노했고 좌절했다. 마침내 구로다의 시즌 마지막 등판일이 찾아왔고 팬들은 절절한 마음을 담은 대형 현수막을 응원석에 내걸었다.
2006년 10월 16일 쿠로다 히로키의 마지막 등판 경기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팬들이 내건 현수막. 유튜브 구로다 히로키 다큐 캡처"우리는 함께 싸워왔다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미래에 빛나는 그 날까지 그대가 눈물을 흘린다면 그대의 눈물이 되어주리
카프의 에이스 구로다 히로키" 팬들은 훗날 영구결번이 된 구로다의 등번호 15번을 쓴 빨간 피켓을 들고 "구로다"를 외치며 울었다. 이에 구로다는 기자회견을 열어 "타 구단의 유니폼을 입고 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카프의 팬과 선수를 상대로 공을 던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며 잔류를 선언했다.
그리고 1년 뒤 구로다는 카프 출신 최초의 메이저리거로서 LA다저스로 떠났다. 투수로는 전성기가 지난 만 33살의 나이.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이라던 그는 히로시마 팬들에게 약속을 한다. "힘이 있을 때 돌아오고 싶다. 돌아온다면 카프 밖에 없다"
일본 야구계는 구로다의 도전에 반신반의했다. 많은 나이에 구속도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구로다는 구종과 볼 배합 변화 등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7년 동안 확실한 선발로 활약했다. 타자가 친 타구에 머리를 맞는 부상도 극복했다. 3년을 뛰었던 뉴욕 양키스에서는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활약했다. 2012년 뉴욕 이적 첫 해에는 자신의 일본 다승 기록을 넘어선 16승을 거두는 등 은퇴 시즌까지 미일을 합쳐 7시즌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했다.
2009년 8월 타구에 머리를 맞아 병원으로 긴급 이송된 뒤 해당 타자가 '야구를 하지 못하겠다'는 사죄의 말을 전하자 "내가 당신의 공을 맞은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해달라"고 위로한 '상남자' 사연을 전한 기사. 사진=풀카운트 캡처구로다는 이례적으로 MLB 4년 차부터 "팀에 폐가 되기 싫다"며 1년 계약만을 맺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2014년에 밝혀진다. 그해 구로다의 성적은 11승 9패 199.0이닝 방어율 3.71이었다. 39살 노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결과였다. 샌디에고, LA 등이 영입을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구로다는 연봉 1800만 달러(260억 원)를 가볍게 뿌리치고 4억 엔(37억 원) 짜리 히로시마행을 선언했다. 친정 팬들과 약속대로 힘이 있을 때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구로다가 1년 계약을 고집했던 이유였다.
구로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자신의 말에 세상이 의아해하자 이렇게 답했다. "스포츠 선수는 아이들에게 꿈을 주는 존재입니다. 훗날 내 인생을 돌이켜 볼 때 가족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나의 꿈입니다"
약속을 지킨 '상남자'의 귀환에 15번을 비워두고 기다렸던 히로시마는 들끓었다. 구로다와 카프는 결국 2016년 25년 만에 퍼시픽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카프는 이어진 일본시리즈에서 오타니 쇼헤이의 닛폰햄에 패배했다-
2016년 11월 5일 히로시마 시내에서 31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히로시마 도요 카프 우승 카 퍼레이드를 열리고 있다. 사진=마쓰다 Zoom-Zoom 블로그41살의 구로다는 시즌 후 열린 우승 카 퍼레이드를 마친 뒤 카프 홈구장에서 은퇴식을 가졌다.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상남자'는 마운드 앞에서 오른쪽 무릎을 꿇고 앉아 33초 동안 고개를 숙인 채 울었다. 관중석을 가득 채운 3만801명의 팬들도 함께 흐느꼈다. 야구에 진심인 나라 일본의 낭만야구, 그 감동적인 라스트 신이다.
9년 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일본인 후배 투수 야마모토 요시노부는 투혼의 투구로 LA를 정상으로 하드캐리했다. 2차전 완투승, 6차전 6이닝 1실점 선발승에 이은 다음날 무휴식 2⅔이닝 무실점 구원승이었다. LA 팬들과 팀 동료는 물론 전 세계 야구팬들을 울리고 열광시킨 일본 감동야구의 재현이었다.
2016년 11월 5일 히로시마 시민구장에서 열린 우승 보고회 겸 은퇴식에서 구로다 히로키가 마운드 앞에서 무릎을 끓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데일리 스포츠
한국의 감동야구는 언제쯤 재현될까? 한국시리즈 4승의 '무쇠팔' 최동원, 한일 수퍼리그에서 일본 스타들을 추풍낙엽처럼 돌려세웠던 '나고야의 태양' 선동렬, IMF의 절망을 이겨낼 용기를 준 '코리안 특급' 박찬호, 온 국민에게 약속의 8회를 선사했던 '라이언킹' 이승엽, 전무후무한 타격 7관왕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
우리의 전설들이 무척이나 그리운 가을이다.
2017년 커쇼가 구로다 히로키에게 은퇴 선물로 준 자신의 글러브. "히로에게, 너는 언제나 나의 소중한 캐치볼 파트너야"라고 써 있다. 사진=스포니치 P.S. 야마모토는 올해 월드시리즈에 앞서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는 LA다저스 팀 동료 클레이튼 커쇼(37)에게 "우승 반지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2008년 구로다가 이적한 다저스에는 갓 20살의 신예 유망주가 있었다. 구로다보다 13살 어렸지만 둘은 캐치볼 파트너로 시작해 마음을 터놓는 절친이 됐다. 그가 커쇼였다. 커쇼는 2011년 트레이드 이적을 고민하는 구로다에게 "내 옆에 남아달라"고 붙잡아 구로다를 울렸다. 구로다는 커쇼와 적이 될 수 없다며 다른 리그인 뉴욕 양키스로 옮겼다. -2년 뒤 인터리그로 성사된 둘의 대결은 각각 무실점, 무승부로 끝났다-
2014년 구로다가 히로시마로 복귀하자 커쇼는 "구로다가 등판하면 카프 유니폼을 입고 1루를 지키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구로다는 은퇴 다음해인 2017년 커쇼를 만나러 LA를 찾았다. 커쇼는 대뜸 "캐치볼을 하자"고 했다. 커쇼는 캐치볼을 마친 뒤 자신의 글러브에 메시지를 써서 구로다에게 선물했다. "히로(구로다의 애칭)에게, 너는 언제나 나의 소중한 캐치볼 파트너야."
'상남자' 구로다는 또 울었다.
2016년 7월 23일 미일 통산 200승을 달성한 뒤 기념 티셔츠를 입은 구로다 히로키. 셔츠 뒷면의 글은 입단 1년차 2군에서 1이닝 10실점을 한 내용. "구로다씨가 설마…" 사진=닛칸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