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는 핼러윈을 맞아 코스튬 복장을 한 시민들이 눈에 띄었다. 주보배 기자"친구가 떠난 날이지만, 핼러윈은 영혼을 달래는 날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슬픔을 딛고 즐기고 싶어요."
김효영(20)씨는 31일, 해커 집단 '어나니머스'의 상징으로 알려진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거리를 찾았다. 3년 전 10·29 이태원 참사로 중학교 동창을 잃은 그는 "그날 현장에서 차갑게 식은 친구의 시신을 마주했을 땐 정말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가면 너머로 살짝 붉어진 눈동자가 보였다.
그러면서도 김씨는 "이제는 핼러윈데이를 가족이나 친구끼리 즐기고 싶을 땐 즐겼으면 좋겠다"며 "그날 이후로 (경찰의) 인파 관리가 많이 강화된 것 같아 이제는 조금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7시쯤 찾은 이태원 거리엔 친구, 연인, 가족과 함께 핼러윈데이와 '불금'(불타는 금요일)을 즐기려는 시민들로 가득했다.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발걸음을 한 시민도 있었다. 거리 곳곳에 배치된 경찰과 소방 인력 등은 인파 관리와 위기 상황 대비에 주력했다.
각종 코스튬 넘쳐난 이태원
31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세계음식문화의 거리에서 시민들이 분장을 한 채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핼러윈답게 거리에는 영화와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분장한 시민들이 넘쳐났다. 백설공주와 같은 동화 속 주인공부터 해리포터, 스파이더맨과 같은 영화 주인공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거리의 상점과 식당, 주점 대부분은 불을 환하게 켜고 손님을 맞았으며, 일부 주점 앞에는 대기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해밀톤 골목에서 만난 이모·최모(19) 군은 취재진 앞에서 구름 무늬가 새겨진 검은색 코트를 입고 손가락을 모은 채 포즈를 취했다. 일본 애니메이션 '나루토' 등장인물인 아카츠키 복장을 한 그들은 "10일 뒤면 수능이지만 오늘은 그냥 놀고 싶었다"고 웃었다. 최군은 "학업 스트레스 풀 겸 나왔다. 엄마는 걱정했지만 '안전하게 놀다 오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31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는 핼러윈을 맞아 코스튬 복장을 한 시민들이 눈에 띄었다. 주보배 기자
인기 게임 '슈퍼마리오'의 등장인물인 마리오와 루이지 코스튬을 한 정한결·임성준(25)씨는 지나가는 외국인들의 요청으로 사진을 함께 찍었다. 정씨는 "친구 사이인 마리오와 루이지처럼 저희도 친한 친구 사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옷 두 벌에 3만 5천 원을 주고 샀다"며 "보이는 것처럼 경찰이 통행을 관리해주니까 안전하게 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일 해가 뜰 때까지 놀겠다"고 했다.
이태원역 3번 출구 앞에서 만난 김지성(가명·30대 초반)씨 주변에는 휴대폰으로 그를 촬영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는 '배틀그라운드' 게임 속 캐릭터인 '길리슈트'를 코스튬 대상으로 택했다. 김씨는 "길리슈트의 총기를 따라 사 데만 15만 원이 들었다"며 "지나가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으면서 그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31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세계음식문화의 거리를 찾은 시민들이 중앙분리대를 따라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이날 현장에는 경찰과 구청 관계자들이 곳곳에서 경광봉을 들고 순찰을 돌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119 특별상황실이 가동됐고, 구급차도 주요 도로 인근에 대기했다. 인파가 몰리는 거리 곳곳에는 폴리스라인이 설치돼 시민들의 이동 동선을 통제했고, 횡단보도에서는 파란불이 꺼진 뒤에도 도로를 건너는 사람들을 향해 경찰이 호루라기를 불며 이동을 제지했다. 특히 사고 현장이었던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는 경찰 인력이 집중 배치돼 안전 관리에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코코' 분장한 채로 추모문화제…"아픔 승화하는 지역 되길"
거리의 한켠에선 추모의 발걸음도 이어졌다. 일부 시민들은 해밀톤호텔 옆 골목에 마련된 10.29 기억과 안전의 길(기억과 안전의 길) 추모 쪽지들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묵념했다. 벽에 붙은 노란색 메모지에는 "기억하고, 추모하고, 기도 드립니다", "내년에도 또 인사하러 올게", "그곳에선 아프지 말자" 등의 글자가 적혔다.
서울 강동구 천호동에서 온 김동찬(20)씨는 "오늘 참사를 추모하기 위해 처음으로 이태원을 찾았다"며 "희생자들에게 직접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에 홀로 왔는데 여러 감정이 교차한다"고 털어놨다.
이날 오후 9시부터는 녹사평역 광장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와 시민단체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이 공동 주최하는 추모문화제 '이태원 참사 3주기 애도와 안전의 축제'가 진행됐다.
추모문화제는 10.29 이태원 참사를 추모하는 공연, 활동가 발언, 이태원역으로 행진 순으로 진행됐다.
31일 오후 9시 녹사평역 광장에서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와 시민단체 이태원을 기억하는 호박랜턴이 공동 주최하는 추모문화제 '이태원 참사 3주기 애도와 안전의 축제'가 진행됐다. 주보배 기자추모문화제에는 코스튬을 한 채 참석한 활동가와 시민들이 눈에 띄었다. 영화 '코코'의 주인공 미겔 분장을 한 이상민 활동가는 "영화의 메시지 자체가 죽은 자들을 기억하고 죽은 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그 멕시코 명절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택했다"며 웃었다. 그는 "이태원 지역에서도 계속 살아가는 분들이 계시고, 또 이태원에 살지 않더라도 계속 즐기러 온 분들도 계신다"며 "이태원이 아픔을 승화해내는 지역이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경찰, 서울 인파 관리에 1171명 투입…지하철 역도 통행 관리
이태원 참사 3주기인 29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 세계음식거리에 할로윈데이 장식품이 걸려있다. 류영주 기자행정안전부는 지난 24일부터 11월 2일까지 10일간을 핼러윈 인파관리 특별대책기간으로 지정했다. 서울시는 인파 밀집 예상 지역은 14곳을 정해 자치구·경찰·소방 등 유관기관과 사전 점검부터 현장 순찰 등 대응체계를 가동했다.
인파 밀집 예상 지역은 △이태원 관광특구 △홍대 관광특구 △성수동 카페거리 △건대 맛의 거리 △강남역 △압구정 로데오거리 △명동거리 △익선동 △왕십리역 △신촌 연세로 △발산역 △신림역 △샤로수길 △논현역 등이다.
경찰은 이날 인파 밀집 예상 지역에만 총 1171명의 인력, 기동대 9개 부대를 투입했다. 특히 이태원에는 288명의 경력이 배치됐고, 녹사평역 광장에는 소방 당국의 합동상황실이 꾸려졌다. 6호선 이태원역에는 통행 관리를 위해 서울교통공사 직원 46명이 동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