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딜링룸 현황판에 원/달러 환율이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최근 원·달러 환율이 6개월 만에 1440원대까지 치솟는 등, 지난 4월 이후 최고 수준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한-미 무역협상이 교착 상태에 놓이면서 시장의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에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까 주목된다.
서울 외환시장에 따르면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지난 23일 장중 한때 1441.5원까지 치솟았다. 이는 지난 4월 29일, 국내 정치 불확실성과 미국 관세 조치 등의 영향으로 당시 장 중 고가 1441.5원까지 급등했던 이후 6개월 만에 최고치다.
지난 10일 환율이 1430원대에 이르자, 당국이 지난 13일 "시장의 쏠림 가능성을 경계한다"며 11개월 만에 구두개입에 나섰지만 불과 열흘 만에 1440원대를 뚫은 것이다.
이어 지난 24일에도 전주 대비 17.2원 상승한 1439.4원에 야간 거래를 마쳤다. 지난 4월 초 달러당 1484원까지 넘어섰던 원/달러 환율은 이후 1300원대에 머물렀지만, 지난달 24일 1400원, 25일 1410원을 연이어 넘어서는 등 오름세가 심상치 않아, 향후 1440원대에 고착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특히 다른 주요국 통화와 비교하면 원화의 가치 하락폭이 유독 두드러진다.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지난 24일 야간 거래 종가를 기준으로 지난달 말 대비 2.39% 하락했다.
같은 기간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가 1.31% 절상돼 원화의 하락폭이 훨씬 크다. 실제로 달러화 지수(달러인덱스)를 구성하는 통화 중 유럽연합(EU) 유로(-1.12%), 영국 파운드(-0.86%), 캐나다 달러(-0.75%)는 원화보다 하락 폭이 작았고, 스위스 프랑(+0.10%)과 스웨덴 크로나(+0.16%)는 반대로 달러 대비 강세였다. 원화보다 더 떨어진 통화는 일본 엔(-3.12%)뿐이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3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 금리 결정에 대한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이러한 환율 상승세에 대해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23일 통화정책방향 회의 이후 기자간담회에서 "환율이 한 달 새 약 35원 정도 올랐는데, 4분의 1은 달러 강세, 4분의 3은 지역·국내 요인이었다"고 지적했다.
4분의 3인 지역·국내 요인에 대해서는 △미·중 갈등에 따른 위안화 약세 △일본 확장정책 기대감에 기인한 엔화 약세 △한미 관세 협상과 3500억 달러 대미(對美) 투자 조달 우려 등을 지적했다.
일본에서 다카이치 사나에 신임 총리가 낮은 금리-양적 완화로 디플레이션을 탈출하려던 '아베노믹스'를 계승하겠다고 강조하면서 엔화가 약세를 나타낸 것도 주효했다. 한국과 일본은 세계 수출 시장에서 비슷한 품목을 두고 경쟁하고 있어, 한쪽의 통화가치가 바뀌면 다른 쪽도 영향을 받는 '원-엔 동조' 현상이 있어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 원화도 동반 하락하고는 한다.
'서학개미' 등 내국인 해외투자 증가세도 원화 약세 요인으로 꼽혔다. 이 총재는 "내국인 해외증권투자가 환율 상승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올해 들어 외국인 국내증권투자보다 우리가 나가는 게 거의 4배 수준"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올해 1~8월 거주자 해외증권투자액은 886억 5천만 달러로, 같은 기간 외국인 국내증권투자의 205억 3천만 달러의 약 4.3배에 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8월 2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영접나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만난 뒤 취재진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무엇보다도 특히 한미 관세협상에서 핵심 쟁점인 3500억 달러 대미 투자펀드를 어떻게 구성하고 재원을 조달할 것이냐에 대한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못해 시장의 불안을 키우고 있다.
지난 7월 한미 양국은 한국산 물품에 부과되는 25%의 상호관세를 15%까지 낮추는 대신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패키지를 구성하겠다고 합의했다. 하지만 미국이 한국으로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전액 현금·선불' 투자를 고수하고 있어 협상의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다.
당국은 외환보유고 문을 열거나 시장 조달을 급격히 늘리는 등 외환시장의 충격 없이 이자나 배당 등을 활용해 조달할 수 있는 외화 규모를 연 150억~200억 달러 수준으로 추산하고 있다. 8년에 걸쳐 매년 250억 달러씩, 총 2천억 달러를 투자하라는 미국의 요구와는 격차가 상당하다.
오는 31일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관세 협상이 타결되기를 기대하지만, 대미 투자와 관련해 아직도 한미 양측이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도 미국이 아직도 전액 현금 투자를 요구하느냐는 질문에 "거기까지는 아니다"라고 답하며 일부 진전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협상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한미 정상회담 이후 발표될 협상 결과가 환율은 물론, 한국 경제의 앞날을 좌우할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