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전환기의 국제질서에서 외교의 시간이 왔다. 외교는 서로를 이해하고, 공통점과 차이를 확인하며, 갈등을 해결하고, 협력을 모색하는 수단이다. 이번 APEC이 지속 가능한 한미 관계의 기반을 다지고, 호혜적인 한중 관계 발전의 기회로 삼으며, 달라진 세계에서 새로운 한일협력의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물론 외교는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경주이고, 한 번이 아니라 연속적으로 길게 봐야 한다. 가야 할 길이 멀고 풀어야 할 숙제가 복잡하지만, APEC이 외교의 문을 열기를 바란다.
미중 관계와 연결의 중요성
APEC은 다자 외교의 무대지만, 동시에 수많은 양자 정상회담이 열린다. 그중에서도 세계질서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미·중 정상회담이 가장 중요하다. 트럼프 2기에 이루어지는 첫 번째 정상회담이고, 양국의 무역 갈등이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최근 중국의 희토류 수출통제와 미국의 100% 추가 관세 위협이 부딪히면서, 미·중 정상회담의 결과에 따라 세계 경제 질서가 출렁거릴 것이다.
미·중 양국의 전략경쟁은 '100년의 마라톤'이다. 정상회담으로 일시적인 휴전이 이루어져도 장기적으로 전략경쟁은 계속될 것이다. 양국이 국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서 경쟁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지만, 다시 과거의 협력 시대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자원과 기술의 수출통제, 공급망의 분리, 상호 관세는 달라진 무역 질서의 '뉴노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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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방향만큼 속도도 중요하다. 자유 무역에서 보호무역으로 그리고 상호의존 관계에서 각자도생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고통이 따른다. 수출통제나 관세부과로 경제의 연결을 차단하고자 하는 시도는 시민의 삶을 어렵게 하고, 세계적으로는 무역 감소와 경제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그래서 이번 APEC의 첫 번째 핵심 주제인 연결이 중요하다. 세계는 산업의 분업으로 노동의 이동으로 기술 발전으로 소통의 다양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연결된 세계를 끊고자 하는 시도는 부작용이 적지 않다. 미·중 정상회담이 전략경쟁이라는 방향을 틀지는 못하겠지만, 속도를 조절해서 고통을 줄이는 지혜를 보여주기를 바란다.
국제 무역 질서에서 연결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영역에서 새로운 연결을 강화해야 한다. 한·중·일 3국의 교집합을 찾고, 아세안과 더 높은 수준으로 협력하고,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를 비롯한 글로벌 사우스와의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 급변하는 외교 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변화로 선택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했고, 산업 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제조업 강국이며, 세계와 공명할 수 있는 문화강국이다. 자신감을 가지고 새로운 연결을 시도해야 한다.
혁신과 디지털 시대의 윤리
두 번째 주제는 혁신이다. AI를 포함하는 기술 혁신은 사람의 일상을 바꾸고, 산업구조를 변화시키며, 국제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기술 혁신이 지속 가능한 발전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특히 국내에서 그리고 국제관계에서 혁신의 성과가 불평등의 심화로 이어진다면 지속가능성이 없다.
디지털 격차는 국내에서 세대 갈등과 경제적 불평등으로 그리고 국제적으로는 경제력 격차로 이어지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부의 양극화를 더욱 벌여, 사회적 갈등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온다. 정치가 부의 불평등으로 생긴 갈등을 치유해야 한다. 외교가 국가 간 기술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언제나 함께 가야 멀리 갈 수 있다. 기술 혁신의 성과를 불평등을 완화하는 사회적 투자로 돌려야 한다.
기술 혁신의 시대에 인권과 윤리의 중요성도 더욱 커졌다. 세계적으로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가져온 혐오의 확산이 증오의 정치를 부추기고 있다. 기술 혁신의 속도만큼 디지털 시대의 윤리에 대해서도 인식의 확산과 제도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혐오문화의 수출은 통제할 필요가 있고, 이번 캄보디아 사태처럼 국제적인 사이버범죄에 대해서는 공동 대응해야 한다. 아무리 각자도생의 시대라고 하지만, 민주주의를 지키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가치의 연대는 여전히 중요하다.
평화의 땅에서 번영의 꽃이 핀다
연합뉴스세 번째 주제인 번영을 위해서는 평화가 중요하다. 긴장이 높아지면 국방비 부담이 커지고, 재정적자로 이어지고, 금융시장이 불안해진다. 동북아시아에서 한반도와 대만해협은 군사 분야에서 미·중 양국의 전략경쟁이 벌어지는 전선이다. 미·중 정상회담은 동북아시아라는 공간에서 군사의 시간이 아니라 외교의 시간으로 전환하는 계기다. 양국 모두 안보딜레마의 악순환이 아니라, 공동 번영의 지혜를 찾아내기를 바란다.
북미 관계 재개의 기회도 중요하다. 지난 30여 년의 북핵 문제 역사를 돌아보면, 기회를 잃으면 상황은 더욱 악화했다. 물론 현재의 국면은 어렵고 복잡하다. 교착의 시간이 길었고, 북한의 핵 능력이 높아졌고, 러·우 전쟁에 북한이 참여하면서 북러 관계가 달라졌다. 협상의 문을 열기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그러나 APEC이라는 외교의 문이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협상 재개의 입구라는 점은 분명하다. 북한과 미국 모두,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세계질서가 급변하고 있다. APEC에 참여하는 많은 국가는 예측하기 어려운 정세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복합 위기의 강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서는 공동의 지혜가 필요하다. 전환기일수록 평화가 중요하다. 튼튼한 평화의 땅에서 아름다운 번영의 꽃이 핀다. 지속 가능한 번영을 위해서는 지속 가능한 평화가 필요하다.
김연철 전 통일부장관·인제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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