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령도 사곶해변. 인천시 제공"작년 이맘때였어요. 고구마밭에서 일하다 굉음을 들었죠. 바로 옆이 항공부대입니다."
북한 최접경지인 백령도 어민 김진수(67) 씨는 지난해 10월 어느 날, 아내와 함께 밭일을 하다 낯선 소리에 손을 멈췄다. 머리 위로 들려온 건 묘한 엔진음이었다. 앵앵거리는 소리가 한참 하늘을 가르더니 금세 멀어졌다. 소음은 이튿날까지 반복됐다.
마을에는 금세 소문이 돌았고 한 이웃은 작은 비행체가 날아다니는 걸 봤다고 했다. 무인기(드론)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한국군 드론이 북한 평양을 침투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섬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김씨는 두려운 마음에 군부대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물었지만, 의문만 더해졌다고 한다.
"드론을 띄운 적이 없다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북한 보도가 나오고 우리 쪽 보수 언론들도 그대로 인용을 했는데… 주민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겁니다."
북한이 평양에서 한국군에서 운용하는 드론과 동일 기종의 무인기 잔해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공개한 사진. 연합뉴스김씨 목소리는 점차 분노로 떨렸다. 북한 측의 '원점 타격' 발언에 그 대상이 우리 동네가 될 수 있다는 걸 직감한 그는 과거 포격전들을 떠올렸다. 서해5도는 연평‧대청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전 등 충돌이 반복됐던 곳이다. 이후 12‧3 계엄으로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그러고는 대통령 탄핵과 지난 6월 대선을 거쳐 혼란 상황은 다소 누그러지는 듯했다. 그제서야 김씨는 "섬에도 봄이 왔다"고 했다. 주민들에겐 '평화가 곧 삶'이다.
내란특검 수사로 미궁에 빠졌던 드론 사건에 관한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있고, 접경지의 불안감은 새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 변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김씨는 추석연휴를 앞둔 지난달 26일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백령도는 연평도보다 화력이 더 막강한 거점으로, 만약 북한이 대응했다면 우리만 희생됐을 것"이라며 "다시는 그런 무모한 시도가 없도록 평화 정책을 안착시켜야 한다"고 바랐다.
"조용해야 어업이 산다"…잠잠해진 갈등, '무전 싸움'도 소멸
최근 김진수 씨가 백령도 인근 바다에서 잡은 우럭들. 추석 때 판매하기 위해 건조 작업에 들어갔다. 김씨 제공일터에도 변화의 물결이 스며들었다. 지난 정권에서 대북 갈등 심화로 잦아졌던 인근 해상에서의 '무전기 교전'이 사라진 것.
어선에서 통신망을 통해 귀에 꽂히던 우리 군과 북한군 간 '기 싸움'이 상대를 자극하지 않겠다는 국방기조에 따라 전면 중단되자, 어업현장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김씨는 "작년엔 북에서 시비를 걸고, 또 우리도 거세게 반격하는 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매일 들려와 일손이 제대로 안 잡혔다"며 "이제 완전히 사라져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어 "어민들은 그 모든 대화를 조업 중 실시간으로 듣느라 불안해서 그물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며 "교전 상황에 따라 배를 옮기다보면 어획량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태도 전환 때문인지, 정부의 대응방식 차이 덕분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매일 바다에서 생계를 짊어져야 하는 주민들이 느끼는 변화는 분명했다.
소청도 마을 예동선착장. 인천시 제공그는 "정권 바뀌고 나서는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며 "무전기가 완전히 조용해졌다. 다들 더 나아지지 않겠냐는 기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씨는 북한 황해도가 고향인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자식들도 다 북한이 고향인 것이나 다름없다"며 "이념과 정파를 떠나 우리가 바라는 건 오직 평화"라고 강조했다.
南北 긴장 해소로 '새벽방송 중단', 캠핑장에도 훈풍
북한과 직선거리로 불과 3㎞ 떨어진 경기 김포시의 한 캠핑장 역시 고요를 되찾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새벽마다 북쪽에서 울려 퍼지는 대남 확성기 방송으로 귀신소리와 쇳소리, 각종 짐승 울음소리로 몸살을 앓던 지역이었다. 온라인 후기에는 올 상반기까지 "대남방송 때문에 밤을 꼬박 샜다", "소음이 너무 심하다"는 등의 불만 게시글이 쏟아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걱정했는데 방송이 사라졌다", "이제야 마음 놓고 올 수 있겠다"는 긍정 후기들로 바뀌었다.
경기 김포시 내 북한 접경지에 위치한 캠핑장 모습. 박창주 기자그 배경에는 남북 관계의 미묘한 변화가 깔려 있다. 이재명 대통령 취임 직후 정부가 대북 확성기 가동을 중단하고 평화 메시지를 내면서, 북한도 즉각 대남방송을 멈췄다. 철조망 너머의 정치적 긴장이 어느 정도 완화된 것만으로도, 일상의 평화가 되살아난 셈이다.
이처럼 자연 속 '힐링(치유)'이 보장되면서 캠핑장 예약은 다시 꽉 찼다. 캠핑객들이 몰리는 금요일과 주말휴일 기준, 20여 개 사이트가 2~3주 안으로 모두 '예약완료' 상태다.
캠핑장 사장 A(50대)씨는 "작년 추석 때 남북관계가 얼어붙으면서 대남방송이 엄청 심했다"고 돌이키며 "다행히 대선 이후 방송이 멈추면서 다시 손님들이 늘고 있다"고 안도했다.
여행객들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한 가족 단위 캠핑객은 "예전에는 소음 때문에 오기 꺼려졌는데, 지금은 너무 조용해서 밤새 편히 잤다"며 웃었다. 또 다른 고객은 "휴전선 근처여서 걱정했지만, 막상 와 보니 고요해서 좋았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일상의 평화' 되찾았지만…"무너진 경제 회복은 아직"
다만 섬 주민이든 내륙 접경지 상인이든 열악한 생활환경과 침체된 지역경제에 대해서는 "민생의 평화도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진수 씨는 "북한과 가깝다는 이유로 하루 절반인 12시간만 어업이 가능하다"며 "시간규제는 물론 NLL(북방한계선)까지는 5㎞ 거리인데 (어장 영역을) 1㎞도 안 늘려준다"고 토로했다.
백령도 두무진. 인천시 제공실제로 서해5도는 야간에 어선의 입·출항이 불가한 데다, 어업 공간도 제한된다. 북한과 맞닿아 있어 경제활동이 제약되는 것으로, 어민들은 이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려 오고 있다.
김씨는 "강원도는 시간 맞춰 조업을 허용해준다. 우리 지역은 밖에는 중국어선이 몰려들고, 안에서는 우리 군이 1970년대 어장 경계선만 고집한다"며 "고속정 등 방어 장비들도 갖춰진 만큼, 동쪽이나 서쪽으로 조금씩만 (어장을) 확장해줘도 어획량이 늘 것"이라고 촉구했다.
캠핑장 운영과 함께 농사를 짓는 A씨도 "대남방송 중단으로 손님들 발길이 되살아난 건 다행이지만, 갈 길이 멀다"며 "가을 성수기다운 매출을 거두기엔 아직 부족하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A씨는 "전반적인 경기를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