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씨는 지난 5월, 전 남자친구의 잦은 폭행에 지쳐 이별을 통보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일방적인 연락은 수개월 동안 이어졌다. 술을 마시는 날엔 A씨에게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A씨가 연락을 받지 않자, 자신의 지인들을 통해서까지 연락을 해왔다. A씨는 보복이 두려워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교제폭력은 흔히 암수범죄(수사기관 등이 인지하지 못하는 범죄)로 끝나버린다. 가해자를 자극할까 두려워 피해자가 경찰에 공식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드물다. 전문가들은 단 한 차례의 신고만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상은 이미 피해자의 삶이 무너졌을 상황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교제폭력 특성상 그만큼 참다 못해 어렵게 신고로 이어진 경우가 흔하다는 뜻이다.
피해자가 교제관계에 있던 가해자에게 목숨을 잃는 사건이 잇따르면서 경찰의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교제폭력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을 높이고, 교제폭력을 다룰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없던 일로 해달라" 처벌불원에 경찰 대응 한계
교제폭력 사건을 다루는 일선 경찰관들이 꼽는 가장 큰 어려움은 사건 처리 과정이 피해자의 의사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이다. 교제폭력 피해자가 신고했다가도 철회하거나, 수사 과정에서 처벌불원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선 경찰서 여성청소년과 소속 한 경찰관은 "같은 커플이 반복해서 신고하는 경우가 많은데, 막상 출동하면 서로 화해했다고 돌아가 달라고 한다. 가장 곤란한 상황"이라며 "눈으로 보이는 상해가 없으면 경찰이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조치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현행법상 교제폭력을 별도로 처벌하는 법적 근거가 없다. 그러다 보니 교제폭력이 발생하면 현장 경찰관은 물리적인 폭력의 흔적부터 살피게 되는데, 폭행죄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반의사불벌죄라 현장에서 종결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지난 7월 29일 대전에서 발생한 교제 살인 사건의 경우에도 범행 이전 피해자가 네 차례 관련 신고를 했지만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해 사건이 종결됐었다.
실제 경찰청이 올해 2월 7일부터 13일까지 일주일간 교제폭력 112신고 1129건을 분석한 결과, 이중 절반인 50.6%(신고단계 36.2%·수사단계 14.4%)가 피해자가 처벌불원 의사를 밝혀 종결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신고 건수 중 46.7%(527건)는 과거에도 비슷한 신고 이력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청 소속 한 경찰관은 "규정상 교제폭력 관련 112신고가 들어오면 다음 날 안전 여부를 다시 확인해야 하는데, 전화를 받지 않거나 전화를 받아도 '술에 취해서 그랬다'는 등 해결됐으니 없던 일로 해달라는 경우가 많다"며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피해자의 의사 번복이 쉽기 때문에 실무적으로는 폭행 정도에 따라서 사건을 처리하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은 제도적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양한 법률을 적용하고 있다. 특수폭행, 재물손괴 등 반의사불벌죄가 아닌 다른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 살펴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사건을 처리하는 식이다. 또 일방적인 괴롭힘이나 따라다님이 있으면 스토킹처벌법을, 가해자와 피해자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면 사실혼 관계로 파악해 가정폭력특별법을 적용하는 식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그러나 경찰이 피해자 보호를 위해 스토킹처벌법에 따라 긴급응급조치와 잠정조치 등을 신청해도 법원이 이를 기각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도 고충이다.
지난 7월 31일 유재성 경찰청장 직무대행은 스토킹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자 잠정조치 신청을 적극적으로 하라고 일선 경찰에 지시했다. 실제로 지난 8월 한 달 동안 '전자발찌' 불리는 전자장치 부착 잠정조치(3호의 2) 신청은 지난 1~7월 하루 평균 1.1건에서 지난 8월 한 달간 7.5건으로 7배 이상 늘었지만, 경찰 신청 대비 법원의 인용률은 약 33.3%로 이전과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됐다. 스토킹 검거 인원 대비 구속률도 2022년 3.3%, 2023년 3.0%, 2024년 3.0% 수준으로 매우 낮다는 게 여성계의 평가다.
서울의 한 경찰서 경찰관은 "경찰이 현장에서 느끼는 가해자에 대한 위험성이나 위기의식 수준이 판사와 괴리가 있는 것 같다"며 "검찰이나 법원이 잠정조치를 기각한 사이에 피해자가 살해당하는 일이 반복된다"고 토로했다.
지난 7월 경기 의정부, 울산, 대전 등에서 연달아 발생한 스토킹 살인 사건 모두 범행 이전 피해자의 신고가 수차례 있었지만 범행을 막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7월 26일 경기 의정부에서 직장동료에게 살해당한 50대 여성은 범행 전부터 지속적으로 스토킹을 당해 세 차례나 신고했지만, 검찰이 경찰의 잠정조치 신청을 반려했다. 7월 28일 울산에서 헤어진 연인을 찾아가 흉기를 휘두른 30대 남성은 접근금지 등 잠정조치 결정을 받았는데도 또 찾아가 범행을 저질렀다.
핵심은 "피해자 보호"…교제폭력 입법 시급
연합뉴스교제폭력 대응의 핵심은 '피해자 보호'인데, 현행 제도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일선 경찰관과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근본적으로는 교제폭력을 별도로 규정하는 법을 만들어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찰청 여개명 여성안전기획과장은 "교제폭력을 규율할 수 있는 법이 마련되면 스토킹 사건처럼 경찰이 긴급임시조치나 잠정조치를 취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긴다"며 "가정폭력에 해당되는지 스토킹 행위가 있었는지 등을 억지로 찾아볼 필요 없기 때문에 일선 경찰관들이 부담이 많이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회에 교제폭력특별법 제정안을 포함해 가정폭력처벌법이나 스토킹처벌법 개정안 등 관련 법안 9건이 발의돼 있다. 교제폭력도 스토킹처벌법처럼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없애고, 긴급응급조치·잠정조치 등 피해자 보호조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김지선 선임연구위원은 "교제폭력은 수사기관의 조치가 끝나고 재판이 길어지는 동안 피해자를 보호해줄 수 없는 게 문제"라며 "교제폭력 입법 시 형사절차와 별개로 피해자가 법원에 직접 보호조치를 신청할 수 있는 피해자보호명령제도도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재 피해자보호명령제도는 가정폭력처벌법에서만 시행되고 있는데, 기간이 최대 3년이고 조사관이 이행 여부를 감독할 수 있는 등 장점이 많아 피해자에게 더 실효성 있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도 개선과 함께 일선 경찰의 초동 대응 단계에서의 인식 개선 교육도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김 위원은 "여전히 연인 관계라는 이유로 사건을 가볍게 보거나 개입을 꺼려하는 시각이 있다"며 "초동 대응하는 경찰들이 현장 대응 매뉴얼의 중요성을 더 크게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영국의 경우 친밀한 관계에서 폭력이 발생하면 전문가가 함께 출동하기도 한다"며 "교육에 한계가 있다면 외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정부도 교제폭력 대응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방침이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24일 법무부, 경찰청과 함께 대책회의를 열어 교제폭력 사건과 관련해 제도적 사각지대를 해소할 방안을 논의했다. 교제폭력 관련법을 마련하고 처벌불원 의사가 있어도 재범 위험성을 고려해 가해자에 대한 유치나 구속 신청을 하는 등 사법기관이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이 추진될 예정이다.